오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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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무렵 오미리에도 근대교육의 물결이 밀려들었는데, 그 출발은 오릉학술강습소이다. 오릉학술강습소는 김헌섭(金憲燮)의 발기로 창설되었으며, 초대교장은 김병택(金秉澤)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지금의 죽암서실에 교사를 마련하였다가 이후 도림강당으로 옮겼으며, 그런 다음 현재의 화수당(오릉학술강습소)으로 이건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에서는 보통과정(지금의 초등과정)을 가르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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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 풍산(豐山), 자는 회일(會一)이다. 1894년(고종 3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김씨 동성마을인 오미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만수는 1913년 만주로 망명하여 길남장(吉南庄)의 군사가 되었다. 길남장은 1918년 봄 안동 출신으로 만주 지역 최고 지도자인 이상룡(李相龍)이 화전현에 설치한 병영이다. 그 후 김만수는 19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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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지명유래는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오미마을표지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즉 원래는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으나, 허백당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릉동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일컫기도 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무(畝)’ 자를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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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형성된 성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1930년대의 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마을 총수는 28,336개로 이 가운데 14,672개가 동성마을이었다. 우리의 전통마을 가운데 반 이상이 동성마을인 셈이다. 동성마을은 동족부락(同族部落)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1930년대부터 주로 일본인 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일반화된 용어이다. 그러나 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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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가뭄이 이어지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지금이야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미리 역시 이런 전통을 갖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 자리한 죽암정 근처에 가서 축문을 읽으면서 엄숙하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기우제는 마을 남성들이 주도해 온 것으로, 오미리에서는 여성들만의 기우제 전통이 따로 있었다. 여성들의 경우, 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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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동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지낸다. 서낭당이 세 곳이기 때문에 제관 역시 세 명을 선출하는데, 이를 ‘삼제관’이라고 한다. 기혼 남성 가운데 상주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관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을 어른들이 상의하여 결정하는 편이다. 신분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절에는 주로 아랫사람들이 제관을 맡았으며, 풍산김씨들이 제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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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동제에는 마을굿의 전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우선 동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월 열흘 무렵이 되면 집집마다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하러 다녔다. 이를 오미리에서는 ‘굿 친다’ 혹은 ‘굿 두드린다’고 했는데, 그 무리를 굿패라고 불렀다. 굿패가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집주인이 쌀 한 되박을 자루에 부어 주고는 식구들이 함께 흥을 즐기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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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동제당은 원당과 중당, 하당으로 3당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삼당 가운데 원당은 남편에 해당하는 서낭신이고, 중당과 하당은 본처와 소실에 해당한다. 상사나무 둑에 자리하고 있는 원당은 서낭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래 3백 년 이상 되는 소나무를 모시고 있었으나 30년 전 태풍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추원사(追遠祠) 경내에 있던 은행나무를 옮겨다가 심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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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金應燮)은 1878년에 김경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한학을 배우고 1907년 한성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함흥재판소 검사를 역임했으며, 1909년부터는 영변구재판소 판사로 재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이듬해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강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만에 사직하고, 같은 해 7월 평양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가 대구로 사무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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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오미리의 부녀자들 역시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열망이 컸다. 그럴 경우 동제당에 가서 기원을 드리곤 했는데, 더욱 강렬한 효험을 원하는 경우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에 사용했던 종짓불을 몰래 갖고 와서 집에 모셔 두고는 기원을 드리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정월 대보름 동제당 주변에는 종짓불을 차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아녀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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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술 단체. 안동문화연구회는 안동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조사 연구 활동을 통하여 올바른 향토사를 정립하고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지역에 흩어져있는 문화유산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안동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지역민들의 문화 의식을 높여 보자는데 인식을 같이한 당시 안동문화회관 이진구 관장과 안동대학교 사학과 임세권 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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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金萬秀)는 1893년 학호공파 김봉조의 10세손이자 김낙선(金洛璇)의 차남으로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심곡공파 김낙운(金洛雲)의 양자로 들어간 김만수는, 양부(養父)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18세에 풍산에 위치한 역동의숙(嶧洞義塾)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평소 나라 잃은 아픔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엿보던 김만수는 1915년 족친인 김응섭(金應燮)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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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가」는 유교적 전통과 종족의식이 강한 동성마을에서 주로 전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작품을 말한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집안에서 전해 오는 「세덕가」를 지은 사람은 김병철(金秉喆, 1881~1951)이라고 한다. 김병철은 김봉조(金奉祖)의 후손으로, 당대 손꼽히는 한학자였으며 숭조의식도 각별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덕가」는 김병철이 40세 되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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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에 있는 법정리. 풍산김씨(豊山金氏) 500년 세거지로, 조선 초기에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의 8세손 김자순(金子純)이 처음 마을에 정착하면서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하여 오릉동(五陵洞)이라 하였다가, 후손 의정공(義貞公)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하므로 이랑 ‘무(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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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풍산김씨 동성마을. 김대현(金大賢)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내렸다. 경주 출신의 김연성이 관직에 있으면서 풍산 석릉촌(石陵村)에 와 있던 중 오미리에 별서(別墅)를 마련한 뒤로 현손인 김자순(金子純)이 서울 장의동에서 오미리로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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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는 근대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록(日錄)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을미년과 병신년에 발생한 안동 의병운동을 기록해 둔 이른바 『을미병신일록』이 가장 주목된다. 『을미병신일록』의 저자는 김정섭(金鼎燮)이다. 그는 병신년에 예안 의진에서 의병부장으로 활동했던 이중린(李中麟)의 사위이면서 동시에 영감댁의 주손이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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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집성촌락이 그러하듯 오미리에도 고색창연한 와가(瓦家)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허백당(虛白堂) 종택을 비롯하여 참봉댁과 영감댁은 오미리의 위상을 드높이는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된 허백당 종택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 대인 1576년에 김대현(金大賢)이 부친인 김농(金農)의 명을 받들어 지금의 영감댁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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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金祉燮)은 1884년 오미리에서 김숭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나 8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주가 뛰어나 천재라는 말을 듣곤 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907년 3월에 보통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5월 경상북도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909년 서울로 올라가서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서 일본어를 불과 1개월 만에 수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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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은 1936년 4월 13일(음력) 오미리 경남재에서 출생했다. 독립운동자금을 대느라 살던 집까지 팔던 집안 어른들로 인해 그는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동고등학교 재학 시절, 안동시내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창현은 주말마다 집안일을 돕기 위해 24㎞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러나 일을 끝내지 못하면 2~3일씩 학교를 가지 못하는 일도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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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 오는 것으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 있다. 2009년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는 『세전서화첩』의 편찬자는 김중휴(金重休)로, 1797년 오미리에서 태어나서 1863년에 숨을 거두었다. 『세전서화첩』은 건(乾)과 곤(坤)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로 26.5㎝, 세로 36.0㎝이다. 수록된 그림은 풍산김씨 10세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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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보면, 오미리는 태백산의 지맥을 이어받은 동쪽의 아미산(峨眉山)을 청룡, 서쪽의 도인산(道仁山)을 백호, 남쪽의 검무산(劍舞山)을 주작, 학가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 내리면서 솟은 북쪽의 죽자봉(竹子峰)을 현무로 하고 있다. 특히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거무산(일명 검무산)의 자태는 밑변이 편편하고 넓은 삼각산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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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金大賢)은 1553년 부친 김농(金農)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1602년 숨을 거두었다. 호는 유연당(悠然堂)으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김대현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살았던 그는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으로부터 글을 배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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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 있는 추원사(일명 도림추원사)는 1758년(영조 34)에 건립되었고, 1806년(순조 6)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도림(道林)은 추원사(追遠祠)가 보림산(甫林山) 도봉(道峯) 아래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림추원사는 김대현(金大賢)과 그의 아들 8명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으로, 오미리 풍산김씨의 가장 핵심적인 추모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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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행정구역. 풍산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자를 합친 것처럼 생겨 이 두 글자를 합하여 ‘풍(豊)’자를 쓰고, 뫼 ‘산(山)’자를 붙여 풍산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하지현(下枝縣)에 속하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풍산현(豊山縣)으로 개칭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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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풍산읍을 관할하는 행정 기관. 경상북도 안동시를 구성하고 있는 1개 읍[풍산읍], 13개 면[와룡면, 북후면, 서후면, 풍천면, 일직면, 남후면, 남선면, 임하면, 길안면, 임동면, 예안면, 도산면, 녹전면], 10개 행정동[중구동, 명륜동, 용상동, 서구동, 태화동, 평화동, 안기동, 옥동, 송하동, 강남동] 중 풍산읍의 행정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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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金榮祖)는 1577년 한양 장의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6세 되던 해에 부친을 따라 영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듬해인 7세부터 이웃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라는 사람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여타 학동들에 비해 총명함이 두드러져 “훗날 문호를 일으킬 사람이다.”라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김영조가 8세 되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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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춘유곡(春遊曲)」은 아녀자들이 봄이면 화전놀이를 하면서 읊었던 가사이다. 다음은 「춘유곡」의 전문으로, 오미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고, 또 고된 시집살이의 애환을 애절한 심정으로 구구절절 읊고 있다. 사시가절(四時佳節)얼마인고/ 삼월춘풍웃음이라 인생행락얼마인고/ 소년광음(少年光陰)제일이라 청가묘무방수하(淸歌妙舞芳樹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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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성향이 강한 집성마을인 오미리에서는 조상의 제례를 중시 여기는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그러다 보니 격식과 내용에도 비교적 큰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러나 가가례(家家禮)라는 말도 있듯이, 가문마다 예법이 다른 까닭에 적절한 지침을 세워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역시 다음과 같은 나름의 제례지침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1. 재계와 준비 예문(禮文)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