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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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은 아주 오래 전에 ‘용전’이라 불렸다는데, 옹천리와 관련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는 강신중 옹은 이 이름이 마을의 남산 쪽에 있던 용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옹천이라는 이름은 요새 생겼고. 그 전에는 용전이라고도 그랬어요. 용용(龍)자, 밭전(田)자를 썼어요. 이 뜻이 뭐냐 하면, 옛날 5천 년 전 실농씨가 있었지요. 염제(炎帝) 실농씨라고 하면 의약을 제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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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서 호랑이의 해를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지내던 마을 공동체 제의. 병산별신굿은 병산리의 금병산 일대에서 지난 갑자년인 1924년까지 범의 해를 피하기 위해 매 3년마다 주민 공동으로 지내는 무당굿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주향으로 모시는 병산서원이 있는 풍천면 병산리의 각성받이 농민들과, 풍천면 하회리 풍산류씨의 세력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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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서 용전과 옹천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1981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서 주민 정재현(남, 65)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에 수록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의 옹천은 근래에 생긴 이름이고, 그 전에는 옹천을 용전이라고 불렀다. 용 ‘용(龍)’자에 밭 ‘전(田)’자를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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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안동의진의 직임과 임원(任員) 분장이 기록된 문서. 「안동의소파록(安東義疏爬錄)」은 강원대학교 명예교수인 박한설이 발굴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제9회 안동문화권 독립운동사연구발표회에서 소개하여 학계에 처음 알려졌다. 현재는 박한설 교수의 기증으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895년 말부터 1896년 초에 걸쳐 의병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안동의병도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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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마을에는 아직도 문서가 이어지고 있다. 학식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옹천마을에서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강신중 옹을 찾으면 집을 알려준다. ‘우리 마을 박사님’이라며 자랑하기 바쁘다. 강신중 옹은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만학에 성공한 어른이자 다양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학자이다. 또한 1907년에 설립된 옹천교회의 장로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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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각은 금소에서 옹천강씨 집안으로 시집온 예천임씨 열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904년 고종이 내린 정려각이다. 열녀 예천임씨는 남편 강종헌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운명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무명지를 깨물어 남편에게 수혈함으로써 3개월간 더 살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운명했는데, 그 때 임씨 부인의 나이는 22세였다고 한다. 강신중 옹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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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마을 장터가 쇠퇴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장터의 부흥과 상설시장화를 이루고자 하는 여성이 있다. 바로 옹천장터의 터줏대감 현대식품 강씨 아지매이다. 아지매를 만나서 처음 말을 건네자 돌아온 것은 “요즘 장사 너무 힘들어.”라는 퉁명스러운 한마디였다. 이름도 나이도 한사코 안 가르쳐 주고, 사진 찍는 것도 거부해서 주변을 배회하며 현대식품의 영업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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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의 옹천 입향은 1500년경(홍치말) 강두전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실상은 진주강씨만 들어온 것은 아니고, 밀양박씨와 진성이씨, 안동김씨 등이 함께 들어와서 살았는데, 정확하게 어떤 성씨가 먼저 들어오고 나중에 들어왔는지 선후는 확실하지 않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성씨들은 대부분 큰 세를 확장하지 못하고 마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