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마을
-
1910년 8월 22일에 맺어진 경술국치로 온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이에 항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둘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보다 적극적인 투쟁활동을 벌였다. 후자의 경우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가 하면, 만주 지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
-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자 순국자.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이다. 오미마을 허백당 김양진의 14세손으로, 1840년 풍산면 수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서 태어났다. 김순흠은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895년 말 전국적으로 을...
-
2003년 12월 어느 날, 김창현은 김보현·김두현과 담소를 나누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참나무 숲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흉측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서 외부 사람들이 와서 보면 마을 체면에 이만저만한 손상이 아니라는 걱정을 동시에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김보현이 김창현을 찾아와 1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형님! 이걸 갖고 참나무숲을 좀...
-
1895~1898년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김정섭의 일기. 『일록(日錄)』은 1권 1책으로, 한지에 초서체 세로쓰기로 기록되었으며, 분량은 45쪽 정도가 된다. 『일록』은 1895년 4월에서 1898년 2월 2일까지의 국내 상황과 의병 활동을 기록하고 있으나, 주된 기록은 1895년 8월 19일~1896년 7월 3일까지의 의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 외의 기록은...
-
김창현은 1936년 4월 13일(음력) 오미리 경남재에서 출생했다. 독립운동자금을 대느라 살던 집까지 팔던 집안 어른들로 인해 그는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동고등학교 재학 시절, 안동시내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창현은 주말마다 집안일을 돕기 위해 24㎞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러나 일을 끝내지 못하면 2~3일씩 학교를 가지 못하는 일도 종종...
-
오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유난히 많이 태어난 마을이다. 일본 왕이 살고 있는 황궁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일념을 가슴에 안고 현해탄을 건너간 김지섭을 비롯하여 한국 근대사에서 애국운동을 대표할 만한 주요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 인물들이 펼친 활약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이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
김봉조(金奉祖)는 1572년 한양 장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장남, 곧 팔련오계(八蓮五桂)의 맏형으로 태어났다. 1601년 3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 되던 해인 1613년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김봉조는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사시 합격을 한 이듬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
오미리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춘유곡(春遊曲)」은 아녀자들이 봄이면 화전놀이를 하면서 읊었던 가사이다. 다음은 「춘유곡」의 전문으로, 오미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고, 또 고된 시집살이의 애환을 애절한 심정으로 구구절절 읊고 있다. 사시가절(四時佳節)얼마인고/ 삼월춘풍웃음이라 인생행락얼마인고/ 소년광음(少年光陰)제일이라 청가묘무방수하(淸歌妙舞芳樹下)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