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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320
한자 金正漢
영어음역 Gim Jeonghan
이칭/별칭 부중(扶中),지곡(芝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생년 1711년연표보기
몰년 1766년연표보기
본관 의성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의성. 자는 부중(扶中), 호는 지곡(芝谷). 의성김씨 천전 입향조 청계 김진(金璡)의 큰아들 약봉 김극일(金克一)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김순석(金舜錫)이고, 어머니는 전주류씨로 류봉시(柳奉時)의 딸이다. 부인은 창녕조씨로 병애처사(屛厓處士) 조선장(曺善長)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김정한(金正漢, 1711~1766)은 안동 분포(汾浦)에서 태어났으며, 용모가 마른 송골매[廋鶻] 같고 눈의 정광이 사람을 꿰뚫을 듯했다고 한다. 말도 배우기 전에 다른 사람이 천자문 배우는 것을 곁에서 보고 글자를 깨쳐서 집의 어른이 물으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바르게 가리켰다고 한다. 6~7세에 맏형인 인재(忍齋) 김우한(金宇漢, 1705~1783)을 따라 산사에 가서 공부하면서 『논어(論語)』를 백 번 거듭 읽어 그로부터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고 한다.

김정한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 것은 7세에 아버지를 잃고, 얼마 뒤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어머니가 김우한과 김정한 형제를 불러 놓고 절실하게 학문 연마를 명한 영향이기도 하였다. 10세가 넘어서는 자신을 ‘나는 행도(行道)의 아우 분천(汾川)’이라고 하면서 형 김우한과 자신을 송나라 성리학자인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산 김성탁(金聖鐸) 문하에서 배웠는데, 김성탁의 아들 구사당 김낙행(金樂行)과 맏형의 뒤를 이어 절차탁마하여 김성탁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김성탁이 먼 곳으로 귀양 간 후인 1738년(영조 14) 가솔을 데리고 지곡에 들어가 호를 지곡산인(芝谷散人)이라 하고, 스승의 당부에 따라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에 진력하였다. 향시에 여러 차례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사상]

김정한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기본으로 한 성리학뿐만 아니라 역학 및 성력(星曆, 천문역법)·주수(籌數, 수학)에도 능통하였다. 또한 선기옥형(璇璣玉衡: 천체관측 기구)의 제도에도 밝았다. 김정한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정밀하게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읽는 책의 내용과 의미를 아주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독서하는 책의 문장법을 통찰하였고 나아가 과거 문자에도 능통하였다. 문장은 힘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고 하나 학문의 풍부함과 깊이, 문장 실력에 견주어 글로 표현된 것은 매우 적으며 문집 내용도 분량이 적은 편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지곡집(芝谷集)』 4권 2책이 전한다. 김정한이 살았던 시대에는 돌림병이 창궐하였다. 수많은 가족 친척이 돌림병, 특히 천연두에 희생되었다. 심지어는 열흘 사이에 부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김정한의 글에는 제문 등 죽음을 애달파하는 글이 많은데, 특히 1746년(영조 22)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는 「애한가(哀恨歌)」와 1763년(영조 39)에 돌아간 형을 추모하는 「곡형분(哭兄墳)」은 그 애통함이 절실하다.

[묘소]

묘소는 일지동(日池洞)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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