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2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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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미영 |
1910년 8월 22일에 맺어진 경술국치로 온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이에 항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둘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보다 적극적인 투쟁활동을 벌였다. 후자의 경우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가 하면, 만주 지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힘을 쏟는 형태로 갈라졌다.
당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는 민단조합(民團組合)과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등 비밀조직들이 적지 않게 결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 중 오미마을 출신으로 눈에 띄는 인물이 김낙문(金洛文, 1872~1943)이다. 김낙문은 1908년 단식을 하여 숨을 거둔 김순흠의 넷째 아들로서, 1915년 민단조합 결성에 참여하였다. 민단조합은 1914년 경상북도 문경 지역에서 결성된 비밀 항일단체로서, 활동무대는 주로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주변 지역, 곧 안동과 예천·문경·상주 등이었다.
민단조합은 1910년대 의병 계열의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광복단이나 대한독립의군부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김낙문은 대한독립의군부나 광복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후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결합하여 1925년에 출범한 대한광복회와도 연계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민단조합은 1918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낙문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체포되고, 민단조합 역시 해체되었다. 당시 김낙문은 보안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었다. 이런 이유로 1992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미마을 출신으로 군자금 지원활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물로 김병련(金秉璉, 1897~1949)이 있다. 김병련은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서 태어났지만, 선조들이 오미마을 출신인 까닭에 오미마을 사람이나 다름없다. 김병련은 고향인 봉화에서 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시절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조선상무회와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펼쳤다.
김병련은 대동단 조선지부장으로 있던 신덕영(申德永)을 통해 대동단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또 직접 모금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1년 2월 무렵 대구경찰서에 검거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병태(金秉泰, 1875~1968)도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당시 군자금 모금활동에 앞장섰던 정인옥(鄭寅玉)과 함께 조선독립에 관한 유고문(諭告文)과 군자금 수령증을 작성하는 등 군자금 지원 활동을 맹렬히 펼치다 검거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