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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변화를 겪고 있는 관혼상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20104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영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오미리의 부녀자들 역시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열망이 컸다. 그럴 경우 동제당에 가서 기원을 드리곤 했는데, 더욱 강렬한 효험을 원하는 경우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에 사용했던 종짓불을 몰래 갖고 와서 집에 모셔 두고는 기원을 드리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정월 대보름 동제당 주변에는 종짓불을 차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아녀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때는 제관인 남성들이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출산하면 백일과 돌을 치렀는데, 특히 장손인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여 성대한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벌였다. 이때 안방의 삼신 앞에는 잔칫상을 차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 주고, 또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삼신을 모시지 않은 집이라면 장롱 앞에 잔칫상을 차려 두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마을에서 잔치를 여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인근 도회지 식당 등에서 치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울러 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시로 빠져나가 마을에서 아기가 출생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백일잔치와 돌잔치가 열리는 경우도 거의 없는 편이다.

관례의 경우 현재 오미리에서는 전승이 일체 중단된 상태이다. 다만 드물게나마 70세를 넘긴 마을 사람 가운데 관례를 치른 경우도 간혹 있지만, 이들 역시 내빈을 초대하여 자(字)를 지어 받는 등과 같은 절차를 생략하고, 관복을 착용하고 술을 내려 받는 절차만을 수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관례에 비해 혼례는 의식 자체는 여전히 거행되고 있으나 형식과 내용면에서 큰 변화를 겪어 왔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으로는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전통혼례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이른바 예식장 혼례라는 것이 등장했다고 한다. 현재 70세 이상의 마을 사람들이 경험한 혼례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오미리의 혼반(婚班)은 안동·예천·봉화·상주 등과 같이 인근 지역에 집중해 있으며, 대개 친척들이 주선을 하는 중매혼이 대부분이다. 중매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면 의혼(議婚)을 위한 상견례가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혼인 당사자들은 제외한 중매쟁이와 양가의 바깥사돈들이 참석한다. 이로써 혼인이 성사되면 가장 먼저 혼수와 혼서지(婚書紙), 사주단자를 받는 절차가 행해진다.

이 날을 오미리에서는 ‘함 드는 날’이라고 한다. 함 속에는 혼수품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인연을 맺으라는 의미에서 수숫대와 오색실을 함께 넣는다. 또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감사히 여긴다는 내용의 혼서지도 함께 들어 있는데, 이를 ‘예장지(禮狀紙)’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성에게 혼서지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생 장롱 밑에 보관해 두다가 세상을 뜨면 관 속에 넣어 주는데, 그럼으로써 저승에서도 부부의 인연이 지속된다고 믿었다.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르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며, 이를 위해 신랑 일행이 말이나 버스 등의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신부집으로 갔다. 이처럼 혼례를 거행하기 위해 신부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 걸음’이라고 한다. 이윽고 신부집에 도착하면 대문 앞에 마련해 둔 짚불을 타넘고 들어가곤 했는데, 이는 액운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혼례를 치르고 나서 신랑은 대략 사흘 정도, 길게는 1주일 가량 신부집에 머물고는 돌아가는데, 이를 ‘초행(初行)’이라고 한다. 이후 같은 방식으로 ‘재행(再行)’과 ‘삼행(三行)’이 행해지는데, 약 40~50년 전부터 대폭 축소된 절차로 거행되고 있다. 즉 사흘을 머물 경우 첫날밤은 신부집에서 묵고 다음날은 인재행이라고 하여 마을 내 신부의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신부집으로 다시 와서 하루 묵고는 그 이튿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 다음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나서 삼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라면 신랑의 삼행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신행(新行)을 거행하나 실제로는 달신행과 묵신행이 보다 일반적이었다. 달신행이란 신부가 혼례를 치른 달[月]을 넘기고 시댁으로 가는 것이고, 묵신행은 해[年]를 넘기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치르고는 곧 바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또 대부분 신혼집을 별도로 마련하는 관계로 신랑의 초행·재행·삼행 습속은 완전히 사라진 실정이다. 다만 신행의 경우에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시댁으로 인사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오미리 상례의 대부분은 병원부속 전문장례식장에서 거행되는 추세로 바뀌었다. 이런 이유로 공동 상여를 보관해 두는 곳집도 이미 오래전에 폐허가 되었으며, 상을 치를 때마다 몸부조의 주체적 역할을 맡았던 상여계 역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과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마을 상여계를 중심으로 상례를 치렀으며, 특히 종가 혹은 유력 가문의 경우에는 ‘유월장(踰月葬)’이라고 해서 숨을 거둔 달을 넘겨서 거행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전통적 방식으로 행해졌던 상례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미리에서는 발인을 할 때까지 시신을 넣은 관을 보관하는 ‘토롱’을 만들었다. 대개 사랑채 마당 구석에 관을 안치하고 짚과 흙을 섞어 덮어두는 방식이었는데, 이를 ‘외빈(外賓)한다’라고 한다. 즉 실내 빈소가 아닌 외부에 조성하는 빈소라는 뜻이다. 부고(訃告)의 경우 친인척 및 인근 마을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역적 범위를 넘어 조상 대대로 교의(交誼)를 가져온 각 문중으로 보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연이은 조문객의 행렬로 3일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대개 5일장으로 마쳤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7일장이나 9일장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정보제공]

  • •  정위진(여, 1923년생, 오미리 거주)
  • •  김호재(남, 1928년생, 오미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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