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1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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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영 |
여느 집성촌락이 그러하듯 오미리에도 고색창연한 와가(瓦家)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허백당(虛白堂) 종택을 비롯하여 참봉댁과 영감댁은 오미리의 위상을 드높이는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된 허백당 종택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 대인 1576년에 김대현(金大賢)이 부친인 김농(金農)의 명을 받들어 지금의 영감댁 자리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것으로 전한다.
아울러 종택의 사랑채를 김대현의 조부인 김의정(金義貞)의 아호(雅號)를 따서 유경당(幽敬堂)이라는 별도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당시 사랑채만을 옮기고 나머지 부분은 증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종택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0년 김대현의 아들인 김봉조(金奉祖)가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허백당 종택은 정면 9칸, 측면 6칸 등 모두 30칸의 ㅁ자형을 취하고 있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전형적인 반가(班家) 형태의 가옥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안채는 1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6칸으로 방이 2칸, 누마루가 4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누마루의 기단을 높게 쌓고 팔작지붕을 올림으로써 사대부의 권위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안채로 통하는 중문 우측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사랑채를 별도로 마련해 둔 점도 사대부가로서의 웅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택 뒤편 언덕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진 김대현과 현 종손의 고조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79호로 지정된 참봉댁은 1800년 무렵 김중휴(金重休)가 분가를 할 때 세운 것으로, 그가 제릉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참봉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재봉(金在鳳)의 생가이기도 하다.
참봉댁은 정면 8칸, 측면 5칸의 ㅁ자형으로 전체 20여 칸의 규모를 가진 가옥이다. 참봉댁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곳간의 위치이다. 대부분의 반가(班家) 건축에서 곳간은 외부로 공개되어 있는 데 비해 참봉댁의 경우는 곳간과 안채 사이에 쪽문을 설치하여 노출을 피하고 있다. 아울러 안방 뒤편에 곳간을 마련함으로써 안방 뒷문을 통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아마도 여성들이 사랑채를 방문한 외부 남성들을 의식하지 않고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내외(內外) 배려의 통로일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풍산김씨영감댁’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영감댁은 1759년 김상목(金相穆)이 ㄱ자형 안채 8칸을 세웠고, 이후 그의 손자 김중우(金重佑)에 이르러 ㄴ자형 사랑채가 완성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이 통정대부동부승지의 벼슬을 지냄으로써 ‘영감댁’이라는 택호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김응섭(金應燮)의 생가이기도 하다.
영감댁은 정면 8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모두 27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에는 ‘학남유거(鶴南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사랑채를 완성한 김중우의 호(號)이다. 안채 뒤편에는 4대 조상들의 신주를 모셨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상들의 신주는 한국전쟁 당시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장주(藏主)한 탓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한편 불천위를 모시지 않는 사가(私家)에서 사당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감댁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영감댁이 위치한 터는 원래 허백당 종택이 자리했던 곳으로, 오미리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장소이다. 1576년 김대현에 이르러 허백당 종택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명당을 포기하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간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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