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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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外孫奉祀 |
영어의미역 | Child of One´s Daughter Religious Servic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집필자 | 박동철 |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직계 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받드는 제사.
[개설]
외손봉사는 유교적 종법제도에 의한 친손봉사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행해지던 제사 잇기의 한 방식이다. 직계 비속의 대가 끊겨 더 이상 친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잇게 하지 못할 경우, 딸의 남편이나 자손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한 풍습이다.
[연원 및 변천]
가족은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인류의 탄생 이래로 가족과 친족 문화는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점차 변화하는 것이 보편적인 양상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구분을 없애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회가 부계 혈통 중심의 가족 및 친족 제도를 지속하고 있다. 외손봉사는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 사회로의 변화 과정 중 나타난 우리 고유의 풍습 중 하나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족과 친족제도는 유교의 종법제도에 근간을 두고 있다. 성/남녀(男女), 연령/장유(長幼), 혈통/종지(宗支), 신분계층/반상(班常) 등에 의한 위계질서가 조화로운 사회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추구하였다. 유교에서 종법제도란 부계의 적장자 중심의 혈통 계승을 뜻한다. 이에 입각하여 재산 상속뿐만 아니라 지위 계승, 제사 상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써, 15~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는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어떤 한쪽 혈통을 통한 ‘단계적(單系的) 계승’의 관념이 희박하여 ‘양계적(兩系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혼입하여 들어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나 아들·딸·손자 등의 자손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封祀), 아들딸 가리지 않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상속하는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등의 풍습과 제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안동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러 기록물에서 이러한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다. 1671년 안동의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청계종가에서 작성된 분재기(分財記)에는 “5남매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갖고 부모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기로 했다”는 자녀균분상속과 윤회봉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 외에도 많은 분재기와 문서들에서 재산이 자녀들에게 고르게 상속되었으며, 사위가 처가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직계 비속이 없을 경우 사위나 손자 등 외손을 통하여 제사를 모시게 하는 외손봉사는 양계적 계승보다 한 걸음 더 부계 중심의 혈통 계승에 다가간 풍습이다.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외손봉사가 절대로 나타나지 않고, 딸만 있는 경우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부계 우위의 양계적 계승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손봉사를 할 때에는 외손에게 일정한 재산을 상속하여 제사를 모시게 하고 있다. 이때 처가의 터에 자리를 잡고 재산을 물려받은 외손들이 번성하여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집성촌이나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안동권씨 집성촌이 그러한 예이다. 이후 종법제도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부계 혈통 중심의 적장자 계승이 강화되면서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기 보다는 양자를 들여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외손봉사의 풍속이 다시금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197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는 산아제한(産兒制限) 정책 실시 이후 출산이 꾸준히 줄어들면서 아들을 갖지 못한 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에는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였지만, 오늘날에는 구태여 아들을 낳거나 양자를 들이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사후 자연스럽게 딸에게 제사가 상속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외손봉사는 분재기 등을 통하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다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서는 외손봉사가 제물의 상속과 함께 이루어지며, 여러 대에 걸쳐 지속되고 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조선시대 외손봉사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외가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경기도 파주 출신의 이원수와 혼인하였으나 치전(致奠)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20여 년 동안 생활하다가 시댁인 서울로 올라갔다.
오죽헌은 원래 신사임당의 외증조부 소유였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둘째딸과 혼인한 이사온(용인이씨로 신사임당의 외조부)에게 상속하였다. 아들을 두지 못한 이사온은 다시 자신의 외동딸(신사임당의 어머니)과 혼인한 신명화(신사임당의 아버지)에게 오죽헌을 상속하였다. 아들이 없던 신명화는 세상을 뜨면서 넷째 딸의 아들인 권처균에게 묘소를 돌보아 주는 대가로 오죽헌을, 둘째 딸(신사임당)의 아들인 이이에게는 조상 제사를 지내주는 대가로 서울의 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다. 이 경우에서는 오죽헌을 중심으로 한 외손봉사가 한 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유학의 고장이자 양반의 고장인 안동과 그 인근 지역에서도 외손봉사의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양반이 많은 만큼 종법제도에 입각한 양자제도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외손봉사의 예 또한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우선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외손봉사의 예로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 중 한 명인 김성일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후손으로 안동김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처가에 아들이 없자 장인 장모를 모시기 위하여 지금의 학봉 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도 그의 후손들은 학봉 장인 장모의 묘제를 지내고 있다.
동성반촌으로 유명한 안동 하회마을에 터를 잡고 있는 풍산류씨 가문에서도 외손봉사의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풍산류씨 10세인 류자온(柳子溫)의 자손들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그의 외조부인 권옹(權雍)의 시제를 외손봉사로 올리고 있다. 이는 권옹이 유명(遺命)으로 외손봉사를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권옹의 장인인 배소(裵素) 또한 자손이 없어 사위인 권옹이 제사를 맡았다가 권옹 마저 자손이 없자 그 제사를 외외손(外外孫)인 류자온의 자손들이 물려받아 시제를 올리고 있다. 외손봉사뿐만 아니라 외외손봉사까지 지내고 있는 것이다. 풍산류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장인 역시 후손이 없어 처가의 제사를 이어 받아 지금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해마다 시제를 지내고 있다.
안동의 인근 지역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의 ‘작은맛질’이라는 지역에서도 외손봉사의 예가 발견된다. 이곳은 원래 문경송씨가 개척하여 살던 곳이었는데, 후손이 없자 사위인 밀양손씨에게 터전을 물려주게 되었다. 그런데 밀양손씨마저도 후손이 없자 밀양손씨의 사위인 안동권씨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에게 터를 물려주고, 외손봉사로 조상을 받들게 하였다. 이후 이곳은 안동권씨의 동성반촌이 되었으며, 권의는 작은맛질의 입향조로 인식되고 있다. 권의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밀양손씨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