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810
한자 金應燮
영어음역 Gim Eungseop
이칭/별칭 김응범(金應範),경장(景章),동전(東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류현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법조인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78년연표보기
몰년 1957년연표보기
본관 풍산
대표경력 임시정부 법무장관|정의부 중앙심판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187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가이다.

[활동사항]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