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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575
한자 金永睦
영어음역 Gim Yeongmok
이칭/별칭 근심(謹心)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68년연표보기
몰년 1944년연표보기
본관 김해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근심(謹心). 186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리에서 태어났다. 중국 길림성에 묘소가 있다.

[활동사항]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영목은 같은 해 3월 안동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안동면 만세시위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1차는 3월 13일, 2차는 3월 18일, 3차는 3월 23일이었다. 이 가운데 김영목은 2차와 3차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먼저 안동면 2차 만세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김병우(金炳宇)를 비롯한 김익현(金翊顯)·김계한(金啓漢) 등은 서로 의논하여 3월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장날 낮 12시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시위 군중의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 군중은 안동시 내 곳곳을 다니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다가 3월 19일 0시 50분 무렵 2,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들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군청과 경찰서, 대구지방재판소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에 열린 안동면 3차 만세시위는 안동군민이 대거 참가하여 오후 7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구속자 구출을 위해 경찰서와 대구지방재판소로 밀고 들어갔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인해 30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일로 인하여 김영목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김영목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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