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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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世澤 |
영어음역 | Yi SetaEk |
이칭/별칭 | 맹윤(孟胤, 孟潤),조은(釣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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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성별 | 남 |
생년 | 1716년 |
몰년 | 1777년 |
본관 | 진성 |
대표관직 | 안동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 진성(眞城). 자는 맹윤(孟潤, 孟胤), 호는 조은(釣隱). 퇴계(退溪) 이황(滉)의 8세손이다. 증조부는 이영철(李英哲), 할아버지는 이경(李檠), 아버지는 이수항(李守恒),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안노석(安老石)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세택은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예안현(禮安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이른 나이부터 문장을 공부하였다. 1750년(영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753년 정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검열, 교리를 거쳐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임 중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되었다.
1768년 안동부사로 있을 때에 살옥(殺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단양에 유배되었는데 이때부터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규탄하여 죄상을 밝혔다. 이어 『명의록(明義錄)』을 편찬할 때에 참여하였다.
이세택은 벼슬에 있으면서 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가졌다. 만년에는 전원에 얼마간의 토지를 마련하고 돌아와 조은(釣隱)의 생활을 추구하였다. 낮에는 고요한 책상에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탐구하고, 한가할 때에는 안개 낀 물가에서 소요하고 함영하니 고을 사람들은 그의 덕을 사모하였고 선비들은 그를 종장(宗匠)으로 존경하였다.
[저술 및 작품]
후손들이 이세택의 글을 엮어 만든 『조은유고(釣隱遺稿)』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조가 제문을 내렸는데 그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허락함은 경에게 편히 쉬라는 뜻이었는데, 아직 채 몇 달이 안 되었거늘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어 구원에 묻혔다는 말이 웬 말이요? 지난날 과인이 동궁으로 있을 때, 경에게 『근사록(近思錄)』을 빌렸는데 바로 퇴계 선생의 손길이 묻어 있는 것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