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4 |
---|---|
한자 | 金隆 |
영어음역 | Gim Ryung |
이칭/별칭 | 도성(道盛),물암(勿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김응린(金應麟), 어머니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현자보(玄子保)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륭은 향리의 선비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8세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 『가례(家禮)』,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 등을 배웠다. 이황은 “그대가 글보기를 세밀히 하며 동료 중에서 그 비교가 드물도다. 내가 일찍이 그릇 본 것을 군으로 인하여 개발됨이 많도다. 또한 수법이 심히 간명하여 사람들이 능히 마지못하여 군이 있을 때에 구명하지 못함을 한하고 혹 인편으로 인하여 가르침을 청한다.”라고 높이 칭찬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알려져 1569년(선조 2) 사림의 천거로 집현전참봉이 되었다. 1570년에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부재모상(父在母喪)의 심복인(心服人)으로서 눈물을 흘리면서 분개하며 글을 지어 각 군(郡)에 돌려 충의심을 일깨운 끝에 의병을 일으켜서 왜군을 막았다. 또 체찰사에게 복수의 의리와 휼민(恤民)의 정책을 간절하고 자세히 말한 수백 언(言)의 글을 올리니 모든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김륭은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 경서(經書), 산법(算法),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물암집(勿巖集)』, 『삼서강록(三書講錄)』 등이 있다. 『물암집』 중에는 소천(小川, 현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노루재 전투에 참여한 창의대장 류종개(柳宗介) 이하 많은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는 시가 한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먹을 불끈 쥐어 튼튼한 배장을 믿었노라/ 비바람속의 한 칼은 새털 같이 가벼운데/ 장한 기개는 충혼을 따르지 않을 건가/ 백봉 천길 깊은 골에 성난 물결소리 울렸어라(張拳徒峙膽崢嶸 風雨鴻毛一釼輕 壯氣不隨忠魂葵 百峰千仞怒濤鳴)’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51년(효종 2)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1654년 영주 삼봉정사(三峯精舍)에 제향되었다. 삼봉정사는 1700년(숙종 26) 삼봉서원(三峯書院)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