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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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幽貞門 |
영어음역 | Yujeongmun |
영어의미역 | Yujeong Gat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규복 |
성격 | 문(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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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550년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한서암의 문.
[개설]
유정문(幽貞門)은 도산서당(陶山書堂)의 유정문과 명칭이 동일하다. 두 곳 모두 이황이 만들고 이름을 지은 것으로, 의미 또한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도산서당의 유정문은 이황이 도산서당과 주위의 자연을 칠언시와 오언시로 노래한 『도산잡영(陶山雜詠)』 가운데 한 가지이다. 이때 유정이란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이다. 이는 『주역(周易)』의 ‘이도탄탄 유인정길(履道坦坦 幽人貞吉)’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가는 길이 넓고 평탄하니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르고 길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한서암(寒棲菴)의 명칭은 문헌마다 ‘서’ 자를 달리 기록하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경북마을지』에서는 “한첩암(寒捷庵)은 퇴계 이황이 평소에 독서를 하던 곳으로 정습당(靜習堂)과 유정문이라는 출입문이 있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현재 퇴계 종택 앞에 있는 못을 광영당(光影塘)이라 한다. 한첩암을 지을 때 함께 팠다고 하는데, 당나라 시(詩)의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라는 글에서 이길 첩(捷) 자를 쓰고 있다.
둘째 『안동문화』 9집에서는 “선생은 50세에 고향 토계의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그 앞에 광영당이라는 연못을 팠다. 이때부터 선생은 독서와 사색을 벗 삼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한서암에서 5년 동안 살았는데 그의 인격을 흠모하여 모여드는 학생들이 날로 늘었다. 이에 선생은 이듬해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었다.” 『안동향토지』에서는 “한서암(寒棲菴)은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 독서를 하던 곳으로, 그 건너편인 시냇물 동편에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영가지(永嘉誌)』에서는 한서암(寒棲巖)이라고 쓰고 있어, 서(棲) 자는 『안동향토지』와 같으나 암(巖) 자가 다르다. 한편 『안동의 제사』와 『안동학연구』 1집에서는 한서암(寒栖菴)이라 쓰고 있어 서(栖) 자는 『영가지』의 서(棲) 자와 같으며, 암(菴) 자는 『안동향토지』와 같게 표기하고 있다. 서(棲)와 서(栖)는 살다 또는 거처하다는 뜻을 가진 동일어이며, 암(庵)과 암(菴) 역시 암자를 뜻하는 같은 단어이다. 이 가운데 본문에서 사용한 한서암(寒棲菴)의 표기는 ‘서’ 자의 의미를 살피고 다수의 문헌에 표기되어 있는 둘째의 경우를 따랐다.
[위치]
한서암의 문(門)을 유정(幽貞)이라 하는데, 도산면사무소에서 왕모산성(王母山城) 방향으로 약 2㎞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도산면 토계리 상계마을로 하천을 중심으로 양쪽에 경작지가 발달하였다. 하천의 서남쪽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퇴계 종택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북동쪽에는 한서암이 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200m 정도이다. 한서암은 남서쪽으로 낮아지는 산기슭의 바로 아래 평평한 경작지에 자리한다.
[변천]
이황은 1550년(명종 5) 2월 상계마을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당(堂)은 정습(靜習), 문은 유정(幽貞)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5년여를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한서암을 지을 때 팠던 연못은 광영당이라 하였는데, 현재 퇴계 종택 앞에 있는 것이다.
[형태]
한서암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이며 작은 유정문과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현황]
한서암이 있는 상계마을 주변에는 산천정사(山泉精舍), 추월 한수정(秋月 寒水亭), 퇴계 종택 정려문(退溪 宗宅 旌閭門) 등의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