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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515
한자 古墳
영어음역 Gobun
영어의미역 Tomb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
집필자 임세권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무덤.

[개설]

고분(古墳)은 글자 그대로 옛무덤을 뜻하기도 하나 고고학에서는 특정 시기의 무덤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장례법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무덤의 양식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분의 구조]

고분은 매장 시설, 봉분, 묘역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매장 시설은 흙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토광(土壙)과 시신을 담는 관(棺), 관을 넣는 곽(槨)이 있고 규모가 큰 경우 곽 대신 묘실을 만들기도 한다. 묘실은 대부분 돌로 네 벽과 천장을 만들었다. 무덤에 따라 관이나 곽 시설 없이 토광을 파고 그냥 시신을 묻는 경우도 있고 곽 없이 관만 토광에 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격식을 갖춘 무덤들은 대체로 관과 곽을 모두 사용하며 대규모의 경우 곽 대신 석실 안에 관을 안치한다.

이때 토광만을 사용하면 토광묘, 목관이나 석관을 사용하면 목관묘 또는 석관묘, 목곽 또는 석곽을 사용하면 목곽묘 또는 석곽묘, 회곽을 사용하면 회곽묘, 석실을 사용하면 석실묘라 부른다. 석곽이나 석실은 지하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고 반지하 또는 지상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또 석곽을 사용한 경우 뚜껑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있다.

관은 나무로 만든 목관, 판석을 짜 맞추거나 작은 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든 석관, 질그릇으로 만든 옹관 등이 있다. 여러 종류의 관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 두루 사용되었다. 곽은 작은 돌들로 네 벽을 쌓거나 판석을 이용한 석곽, 나무를 이용한 목곽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 석회를 이용한 회곽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목곽으로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에 사용된 목곽이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졌는데 큰 통나무를 이용하여 귀틀집을 짓듯이 짜 맞춘 대규모의 곽이다.

관이나 곽 또는 묘실의 위에는 흙을 덮어서 봉분을 만들어 분묘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봉분은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 무너지고 평탄하게 되어 주변의 지표면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이른 시기나 또는 그보다 이른 시기의 석관묘·석곽묘·옹관묘 등에서는 넓은 면적에 걸쳐 많은 관들이 매우 가깝게 분포되어 있어 처음부터 봉분이 없는 고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고분의 봉분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경주 시내에 산재하는 적석목곽분의 봉분이다. 거대한 목곽 위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을 10~20m 정도의 높이로 쌓아올린, 산처럼 거대한 형태이다. 거의 경주 일대에 국한되어 있고 시대도 4~5세기로 제한되어 있어서 한국 고분에서는 매우 특수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봉토가 완성되면 분묘 주변에 표지물이나 제사 의식에 필요한 시설 또는 분묘를 장식하기 위한 묘역 시설을 갖추게 된다. 왕이나 귀족 등 지배 계급의 권력 또는 권위가 강력할 때는 묘역 시설이 매우 호화롭고 규모도 컸다.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묘역 시설의 형식이 규모 있게 갖추어지는데, 경주 일대 통일신라시대 왕릉이나 귀족들의 무덤에서 완성된 묘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시기 안동 지역의 고분에서는 묘역 시설을 거의 볼 수 없다. 이유는 신라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라는 데서 오는 한계와, 또 묘역 시설이 잘 갖추어진 고분이었다 하여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고분]

안동 지역의 고분 대다수는 삼국시대의 석곽묘와 석실묘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안동의 삼국시대 고분들은 일직면 조탑리 고분군, 와룡면 중가구리 고분군, 임하면 사의리 고분군, 임동면 마리 고분군·지리 고분군·수곡리 고분군, 태화동 고분군, 정상동 고분군, 남후면 광음리 고분군, 옥동 고분군 등이다. 이 밖에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규모의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 임하면 추월리 고분군·임하리 고분군·금소리 고분군, 풍산읍 막곡리 고분군·회곡리 고분군 등이 알려져 있다.

1. 조탑리 고분군

조탑리 고분군은 모두 100여 기가 넘는 대규모 고분군으로 1960년대에 발굴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전반 중앙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대부분 수혈식 석곽이지만 높이 3.5~5m에 이르는 대형 봉토분에서는 한 봉토 안에 횡구식 석곽이 두 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수혈식은 대부분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세장방형에 속하고 횡구식은 수혈식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봉토도 대형에 속하며, 분포도 수혈식이 산기슭에 치우쳐 있는 데 비하여 넓은 평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조성 시기가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5세기 후반 수혈식 석곽이 먼저 축조되고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였으며, 6세기 중엽 이후에는 방형에 가까운 평면과 궁륭형 천장을 가진 석실분이 많이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2.중가구리 고분군

중가구리 고분군은 수백 기가 넘는 대규모 고분군으로 중가구리 와룡산 남쪽 구릉에 밀집 분포한다. 발굴된 고분 중 대형분은 봉토 밑지름 15~20m, 높이 1.2~2.8m 규모이다. 석곽은 주곽과 부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바닥 평면은 길이 5m, 폭 2m로 서북쪽 단벽은 직선, 동남쪽 단벽은 반원형으로 처리하였다. 한쪽을 반원형으로 처리한 석곽은 안동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역적 특징이다.

동남쪽 단벽은 밖에서 막아 쌓은 것으로 이 단벽을 입구로 하여 추가 매장을 실시한 횡혈식 석곽묘임을 알 수 있다. 내부에서는 세 개의 시상(屍牀)과 다섯 명 이상의 유골이 조사되었다.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사의리 고분군·망천리 고분군

사의리 고분군에서는 신라 고분과 함께 통일신라 고분들이 많이 조사되었다. 신라 고분은 세장방형 석곽인 데 비하여 통일신라의 고분은 폭이 넓고 장축도 능선 축과 일치하거나 또는 비탈면에서 등고선에 직교하는 경우가 많아 고려 이후의 고분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넘어오면서 매장 풍습에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석곽에는 개석이 없는 것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거나 처음부터 개석을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망천리 고분군은 안동 지역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적석 고분이다. 봉토가 적석으로 되어 있고 적석의 중심부에 석곽을 만들었다. 주변에는 작은 석곽과 옹관 등이 부설되어 있었다.

4. 마리 고분군·지리 고분군·수곡리 고분군

임하면 사의리 고분군의 소형 석곽묘들과 비슷하며 개석이 없는 고분이 많다. 출토유물 중에는 가야토기의 특징을 가진 토기류들이 많으며, 조성 시기는 4세기에서 5세기 초로 보고되었으나 5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수곡리 고분군은 할석으로 봉분을 쌓아 올린 적석분으로 적석 봉토 내부에 두 개의 석곽이 나란히 있다. 석곽 내부에는 함몰된 적석이 가득 차 있어서 역시 개석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심부 석곽 주변에 작은 석곽과 옹관이 있어서 하나의 봉토에 다양한 종류의 매장 시설을 갖춘 특이한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지리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청동제 허리띠가 출토된 수혈식 석곽묘가 조사되었다. 고분의 연대는 6세기 중엽 또는 7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고분은 당시 안동 지역의 지방 세력이 어느 정도 신라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통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5. 태화동 고분군

안동시 중앙부에 있는 태화봉 정상 부근 능선에 분포한다. 산 정상부를 봉토로 이용하여 봉토의 외관이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인다. 석곽은 대체로 봉토의 정상부를 피하여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안동의 다른 지역 석곽과 비슷한 세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나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다.

석곽의 폭은 한쪽이 넓고 한쪽은 좁은데 좁은 쪽은 호형으로 둥글게 마감하였다. 바닥은 강자갈을 깔았고 머리 쪽의 바닥은 자갈을 원형으로 돌아가며 깔았다. 개석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내부는 진흙으로 채워져 있다. 유물 중 금동제 ‘산(山)’자 모양의 화살 통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낙동강 유역인 동래·합천·고령·경산 지역의 고분에서만 출토되어 당시 안동의 문화가 낙동강 수계를 따라 가야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고분]

통일신라시대 안동의 고분은 안막동 고분, 임하면 사의리 고분, 임동면 수곡리 고분 등으로 삼국시대 고분에 비하여 매우 수가 적다.

1. 안막동 고분

안막동 고분은 안동에서 조사된 고분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고분으로 연도가 딸린 석실분이다. 봉토는 밑지름 약 10m, 높이 약 3m로 진흙을 여러 층 수평으로 다져 쌓은 판축법으로 쌓았다. 연도는 동남쪽에 붙어 있는데 석실을 향하여 오른쪽에 설치한 우연도형이다. 연도 길이 190㎝, 폭 85㎝, 높이 90㎝로 인화문 장경호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연도 천장에는 모두 네 개의 개석을 덮었고, 연도 입구와 석실과의 경계에는 문이 없고 입구는 폐쇄석으로 채워져 있었다.

석실은 길이 267㎝, 폭 240㎝, 높이 190㎝이며 네 벽은 100㎝ 정도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점차 안으로 기울여 쌓고 네 모서리는 귀접이 형식으로 모를 죽여 석실의 윗부분을 궁륭형으로 만들었다. 천장은 지름 약 130㎝의 둥근 개석을 한 장 덮었다. 이 같은 구조는 고구려 석실 고분과도 비슷하다.

석실 내부는 거의 시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상에는 방향을 서로 달리하는 인골이 다섯 점 있었다. 시상 외의 공간은 연도와 벽체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장경호 한 점이 출토되었다. 개석 윗부분의 봉토 밑에서도 연도 폐쇄 후 묻은 제의용 토기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7세기 중엽 이후의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을 보이지만 고분의 구조는 고구려적인 요소를 보이는 이중적 특징을 보이는 고분이다.

2. 사의리 고분

사의리 고분은 삼국시대 석곽분들과 함께 섞여 분포되어 있다. 삼국시대 석곽에 비하여 폭이 넓고 벽석이 거의 없으며 개석도 사용하지 않았다. 내부는 모두 네 부분으로 구분되었는데 서쪽 끝의 좁은 부분만 칸막이벽이 있고 나머지 세 부분은 칸막이벽 없이 바닥 돌의 차이로 구분되어 있다.

석곽 전체는 길이 380㎝, 폭 170㎝이고 벽석 높이는 약 15㎝에 지나지 않는다. 칸막이벽을 가진 서쪽 끝 석곽에서는 ‘처랑(處郞)’이라는 명문이 있는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어 눈길을 끈다. 이 명문은 통일신라시대 안동 지역의 지배층으로 활동한 화랑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석곽 중심부에서는 치아가 발견되었는데 위치로 보아 세골장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3. 수곡리 고분

반변천 북쪽 강가 비탈면에 있다. 석곽 세 개와 옹관 두 개가 하나의 봉토 아래 있는 대형 고분이다. 봉분의 크기는 동서 약 10m, 남북 약 5m이다. 석곽은 비탈면을 파고 네 벽을 할석으로 쌓아 올린 반지하식이다. 개석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옹관은 동쪽 끝 석곽의 동서 양쪽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고 모두 작은 석곽 안에 들어 있었다.

유물은 안막동 석실분 출토 토기와 비슷한 인화문 토기와 장경호가 있어 비슷한 시기인 7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안막동 석실분이 안동 지역 최고 지배층에 속하는 인물의 무덤이라면 수곡리 석곽분은 삼국시대 전통을 많이 지키고 있는 안동 주변부의 한 단계 낮은 지배층에 속하는 인물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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