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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 폭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94
한자 安東橋爆破
영어의미역 Blasting of Andong Bridge
이칭/별칭 인도교 폭파,철교 폭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희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방어 작전|지연 전술
발생(시작)연도/일시 1950년 8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 8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교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미8군사령부|한국군 수도사단|한국군 2군단사령부

[정의]

1950년 8월 1일 6·25전쟁 중 북한군의 낙동강 도강을 지연시키기 위해 안동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한 사건.

[발단]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군은 한 달이 갓 지난 7월 31일 안동 북부 지역을 지나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을 지휘하던 주한 미8군사령부는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기획하고, 8월 1일 새벽까지 한국군으로 하여금 낙동강을 건너 남하한 뒤 오전 8시에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과]

7월 31일 오후 5시 무렵 미8군사령부가 보낸 연락기가 안동 풍산에 주둔하던 한국군 수도사단에 작전 명령서를 떨어뜨렸고, 이는 운산에 주둔하던 한국군 2군단사령부(군단장 김홍일)에 전달되었다. 이튿날 새벽까지 한국군을 낙동강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8시에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제2군단 소속 6사단과 8사단의 작전 참모들이 방법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면서 전방 부대에 연락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철수 작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부대가 미처 낙동강을 건너지 못한 가운데 북한군이 안동 시내를 굽어보는 영남산에 도달하여 다리를 건너는 한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군 2군단사령부는 적 주력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급한 마음에 아군이 강을 건너고 있는 도중 다리를 폭파하였다. 북한군의 총격으로 아군 사망자가 속출한 가운데, 직접 물에 뛰어들어 강물을 건너려는 병사도 많았다. 깊은 곳이 너비 4m, 깊이 2m 정도의 좁은 강물이었지만 때마침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물은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무장을 갖춘 병사들은 철모를 비롯한 무거운 장비를 모래에 묻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결과]

하지만 건너가는 병사보다 익사하는 병사가 더 많았다. 이때 제16연대 병력만 21명의 장교와 814명의 사병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제21연대도 2대대의 2·3중대에서만 인력의 50%를 잃었다. 적에게 포로가 된 병력까지 감안하면 아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낙동강 방어 작전 차원에서 이루어진 안동 인도교와 철교 폭파는 북한군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시도했던 지연 전술이었다. 그러나 철수 작전의 실패와 적절하지 못한 폭파 시각 선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다. 더구나 2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완전 군장을 갖춘 전투 병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결과였다. 한강교 폭파가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되듯, 안동교 폭파도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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