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157 |
---|---|
한자 | 高麗-臨時首都安東 |
영어의미역 | Andong , Temporary Capital of Goryeo Period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배영동 |
[개설]
930년(태조 13) 고려 태조 왕건은 고창(지금의 안동 지역)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그 여세를 몰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키고, 전쟁에 적극 협력한 안동의 호족 3인에게 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1281년(충렬왕 7) 고려군과 몽골군이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충렬왕은 안동에 머물면서 전황을 파악하였다. 충렬왕이 안동에 머문 것은 당시 고려군 도원수였던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이 안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안동에 머물면서 안동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원격 지휘를 하여 개성에 진입한 홍건적을 물리친 바 있다. 이처럼 안동은 고려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세 차례에 걸쳐 임시 수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후삼국 통일의 바탕이 된 고려 태조의 고창 전투]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군을 포위하자 왕건은 이를 구하기 위해 예안진에 도착하였고, 유금필은 저수봉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930년 1월 병술일에 왕건은 안동의 병산에, 견훤은 맞은편 석산에 진을 치고 온종일 전투를 한 끝에 마침내 견훤이 크게 패배하니 안동 인근의 30여 군현(멀리 울산 포함)이 잇따라 고려에 항복하였고, 그 직후 신라의 동쪽 바닷가 주군(州郡)과 마을이 잇따라 항복하니, 모두 110여개 지역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당시 안동의 지명을 따서 ‘고창 전투’, 격전지명을 따서 ‘병산(甁山) 전투’라고 부른다. 이때 안동의 성주 김선평(金宣平), 행정관 김행(金幸)[후일 권행(權幸)], 호족 장정필[張貞弼: 초명 장길(張吉)]이 앞장서서 왕건을 도와 고려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에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김행에게는 권씨 성을 내리고, 세 사람에게 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고창 전투 당시 태조가 안동에 머문 기간은 929년 12월에 안동에 머문 기간을 제외하고, 930년 1월 1일부터 2월 경자일까지 집계하더라도 최소 36일이 넘는다. 이 기간 동안 경상북도 북부권을 비롯하여 바닷가의 울산·강릉까지가 고려 땅이 된 사실로 미루어, 안동은 이 시기에 고려의 심장부 역할을 하였으며, 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매우 큰 기틀이 된 곳임을 알 수 있다.
태조에게 태사의 벼슬을 받은 삼태사는 바로 안동김씨·안동권씨·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삼태사의 후예들은 안동의 지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오늘날에도 행해지는 안동차전놀이(동채싸움)는 바로 고려 태조의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놀이화 된 것이다.
[일본 정벌과 충렬왕의 안동 행차]
1281년 여몽연합군이 2차 일본 정벌에 나서자 충렬왕은 왕비와 함께 순흥과 예천을 거쳐 안동에 도착하여 한 달 남짓 머물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당시 충렬왕과 왕비 일행이 안동으로 오는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충렬왕이 안동에 온 까닭은 전황을 파악하고, 패배했을 경우 장졸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충렬왕이 전황 파악을 위해 안동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고려군 도원수가 안동 출신의 충렬공 김방경이었고, 또 안동이 왕비의 탕목읍(湯沐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결정적인 이유는 전자였다.
충렬왕 일행이 안동에 오던 날 안동부사 김균(金頵)은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큰 환영 행사를 열었다. 다음 날 전쟁에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은 충렬왕은 이 사실을 원나라에 전하도록 하였으며, 안동 도착 17일차에는 도원수 김방경이 충렬왕의 행궁으로 찾아와서 알현하였다. 이 무렵 김방경은 영호루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충렬왕은 안동의 영은정(迎恩亭)에 행차하여 귀한 제액(題額)을 하사하였다.
충렬왕의 안동 행차는 안동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안동부사 김균이 충렬왕을 위해 채붕을 설치하고 큰 환영 행사를 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안동하회탈 발생에 모종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주가 몽골에 의해서 한국에 전래된 사실을 감안하면, 안동의 특산물 안동소주도 충렬왕 일행이 안동에 머물 때 안동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온 공민왕]
1361년 12월 공민왕은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을 와서 1362년 2월까지 만 70일 동안 머물렀다. 당시 안동은 고려의 ‘남쪽 지역에서 충성과 의리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평가되면서 임시 수도로 선택되었다.
거기에는 안동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 조정에 우호적이었다는 점, 고려 조정의 많은 인물들이 안동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작용하였다. 피난 당시의 28명 호종신하 가운데서 이색(李穡), 홍언박(洪彦博)·홍언유(洪彦猷) 형제, 홍언박의 아들 홍사범(洪師範), 류숙(柳淑), 김군정(金君鼎), 원송수(元松壽), 조운흘(趙云仡) 등 8명이 피난 이전부터 혼인 또는 관직으로 안동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사실은 고려 왕실의 혼인 관계가 국가 위기에 안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점이다.
공민왕은 27대 충숙왕의 아들인데, 왕비 5명[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경화공주(慶華公主), 명덕태후(明德太后), 수비(壽妃)] 가운데 명덕태후 소생이다. 명덕태후는 남양홍씨로 28대 충혜왕의 생모이기도 하다.
즉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온 이유는 함께 내려온 어머니 명덕태후가 홍언박·홍언유 형제의 고모였기 때문이다. 당시 문하시중 홍언박은 고창부원군(古昌府院君) 권준(權準)의 사위였고, 홍언유는 전직 안동도호부사였다. 이처럼 홍언유·홍언박 등과 같은 외척 신하가 안동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 공민왕이 안동을 피난지로 선정한 중요 배경이 되었다.
게다가 공민왕의 친모는 아니지만 어머니에 해당하는 수비(壽妃: 충숙왕의 제5왕비)는 안동 출신인 좌상시(左常侍) 권형[權衡, 일명 권렴(權廉)]의 딸이었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남하할 때, 이미 수비는 사망하였지만 수비의 친정 안동권씨와 인연은 여전히 지속되었을 것이다.
공민왕 일행이 안동에 이르자 목사 김봉환은 공민왕을 환대하였고, 아녀자들은 한겨울에 노국공주를 안동 입구의 송야천에서 등을 구부려 다리를 만들어 내를 건너게 하였다. 안동 일직에 살고 있던 전직 판삼사사(判三司事) 손홍량(孫洪亮)은 평복차림으로 공민왕을 맞이하여 진언을 하기도 하였다.
안동 일원의 여러 산성도 이때 쌓은 것이라고 전하는 것처럼 공민왕은 안동 일원에 피신할 비상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안도감을 가지고 군 지휘자를 정세운으로 교체하여 개성 일원에서 맹위를 떨치던 홍건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도다.”라고 평가하였다.
공민왕은 안동을 떠날 때 안동 사람들의 정성 어린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복주목과 안기역리에게 선물을 내렸고,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면세 혜택까지 주었다. 환도한 뒤에는 피난 당시 여가를 보내던 영호루의 현판 글씨를 내리기도 하였다. 공민왕이 환도한 뒤 손홍량이 왕궁으로 찾아가 축하의 뜻을 전하자 지팡이를 하사하고, 그 뒤 초상화를 내리기도 하였다. 70일 동안 이어진 공민왕의 안동 체류는 안동 출신 인사들이 활발하게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굽혀 인교(人橋)를 놓아 건너게 한 데서 안동놋다리밟기가 유래하였다. 지금도 안동과 청량산 일대에는 공민왕을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마을이 많다. 공민왕을 동신으로 모시는 것은 안동 사람들에 의해서 공민왕이 신격화되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