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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마을 서당골에 위치한 사익재(四益劑)는 옹천장터에서 학가산 방향으로 진행하다 동네가 끝나는 지점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서당 앞으로는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는 멀리 줄지어선 산들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산자락 끝을 정지한 곳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다. 강신중 옹이 사익재에 있는 「서당기(書堂記)」에 쓰여 있는 내용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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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리는 금계산과 옥계천이 마을을 편안하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일컬어 ‘단지형국’이라고 표현했으나, 마을에서 ‘박사님’으로 불리는 강신중 옹은 ‘금계포란형’으로 설명하였다.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과 단지형국은 모양이 비슷하다. 그런데 왜 금계포란의 뜻이 지명에 들어가지 않고 단지의 뜻이 지명에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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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주업인 농촌 지역에서 농업용수의 확보는 생계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농지가 아무리 넓어도 물의 공급이 적절치 못하면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철 고루 비가 내린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장마철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한반도의 기후 특성상 매시기 물 걱정 없이 농사짓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인위적으로 저수지나 보,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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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은 아주 오래 전에 ‘용전’이라 불렸다는데, 옹천리와 관련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는 강신중 옹은 이 이름이 마을의 남산 쪽에 있던 용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옹천이라는 이름은 요새 생겼고. 그 전에는 용전이라고도 그랬어요. 용용(龍)자, 밭전(田)자를 썼어요. 이 뜻이 뭐냐 하면, 옛날 5천 년 전 실농씨가 있었지요. 염제(炎帝) 실농씨라고 하면 의약을 제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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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생활 풍속. 안동은 조선시대에 유교문화가 강성했던 지역으로 반촌과 문중 조직, 서원 등을 통해서 양반문화와 선비문화가 뿌리를 깊이 내린 곳이다. 민속은 민촌의 마을 공동체와 그 주체인 민중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자생적인 전통문화이자 민주적인 생산문화로서, 양반들의 유교문화와 맞서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유교문화가 발전한 만큼 상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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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 지역에서 사용한 통신 수단. 봉수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설치한 통신 수단으로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되었다.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두어,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로 각각 신호하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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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천지리에 있는 신라시대 사찰. 선찰사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사찰로 경상북도 안동과 포항을 잇는 국도 35호선과 청송과 의성을 잇는 지방도 914호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사찰이다. 선찰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선이 노닐 만한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절로 유명했는데, 안동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도연삼절(陶淵三絶)이라 하는 격진령(隔塵領)·도연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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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에 있는 고려시대 포곡식 산성. 성황당 토성과 관련한 기록은 안동 지역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와 『안동향토지(安東鄕土誌)』에서 찾을 수 있다. 『영가지』에는 “성황당 토성은 부(府)의 동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안동향토지』에는 “성황당 토성 터는 지금 용상동 뒤 성황산에 있으며, 동편은 오로봉에 감싸고, 서남에는 낙동강이 둘러, 부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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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아 올린 탑으로,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흙과 돌을 쌓아 올려 묘를 쓰던 습관과, 거룩하게 여겨 기리던 곳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탑을 조성한 뒤부터 불교의 예배 대상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 인도에서는 사발을 엎어 놓은 듯 둥글고 크게 탑을 쌓아 올려 내부 공간을 만들고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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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 지역에 설치된 교통 및 통신 기관. 역(驛)은 신라 487년(소지왕 9)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려 성종 때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이때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구성되었다. 고려 1390년(공양왕 20) 중앙의 외방지역 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관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승제(驛丞制)를 조준(趙浚) 등 개국공신들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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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역 관리 체계. 역은 중앙과 지방간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진상(進上)·공부(貢賦) 등의 공공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 지대(支待)와 숙박 편의를 제공하고 통행인을 검문, 규찰하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역은 통신·숙박 기능 및 역마 제공, 운송의 기능과 지역 방어를 수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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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안동 지역에 설치된 지방 통치 행정 기관. 경상도의 도역(道域)은 산천을 경계로 한 합리적인 도제 확립의 필요에 따라 1413년(태종 13) 상주목(尙州牧) 소속 옥천·황간·영동·청산·보은을 충청도에 귀속시킴으로써 죽령을 북계(北界)로 하고 지리산을 서계(西界)로 하여 설정되었다. 감영은 개국초 경주에 있었으나 1407년(태종 7)경 상주로 옮겼다. 또한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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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안동 지역의 군사 조직. 조선 전기 안동이 속한 경상도의 군사 조직 체계는 관찰사가 지휘권을 장악한 가운데 진관 체제를 근간으로 육군과 수군이 대체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각기 좌·우로 구분되어 조직화되었다. 육군은 좌병사 예하에 경주·안동·대구진관을, 우병사 예하에 상주·진주·김해진관을 각각 설치해 이들 진관으로 군소의 진들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진관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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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포 생산의 역사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현 안동시)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풍산현에 목화를 재배하기가 적합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곧 조선 후기에 이미 이 지역에서 면화가 생산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금소를 포함한 안동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강압적으로 육지면이 재배되어 면화 재배가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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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에 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의 향교. 안동향교는 고려시대에 건립하여 조선시대까지의 유생들의 교육에 힘써 온 국립 중등 교육 기관이다. 건립 이후 많은 유학자들을 배양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중등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다. 예안향교(禮安鄕校)와 더불어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유학 교육과 보급에 힘써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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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안동 지역에서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 양반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으로 ‘상놈’의 상대어이다. 원래 고려시대 문반과 무반, 혹은 동반과 서반을 지칭한 데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문무반(文武班), 동서반(東西班) 등 두 개의 반을 의미하다가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그에 소속된 사람과 그 후손, 그리고 문무반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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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역로에 세워졌던 국영 교통, 통신 및 숙박시설.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 및 외국 사신의 왕래 숙박, 말을 공급하여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한 기관으로 신라시대인 487년(소지왕 9)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성종 대에 더욱 구체화 되어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만들어졌다. 1390년(공양왕 2) 중앙의 외방 지역 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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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소리의 경작지 대부분은 금소천(일명 길안천) 유역의 땅을 개간한 것으로, 보 등의 관개시설을 이용하여 벼농사에 적합한 논으로 변화시켰다. 1970년대 통일벼가 보급되기 이전까지 농촌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농사가 평년작이라도 되는 해에는 그나마 덜했지만 흉년일 때에는 현재의 고리대금이라 할 수 있는 ‘장리(長利)’를 얻어야만 생계를 꾸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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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장 에 대한 기록은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현 안동시) 읍지 『영가지(永嘉誌)』로부터 시작된다. 초기 옹천장은 5일장이 아니라 끝자리가 3일과 9일, 즉 4일 간격, 6일 간격으로 열린 장시였다. 이러한 주기가 1830년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기록에 의하면 현재와 같은 4일과 9일 형태의 5일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400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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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 지역에 설치된 교통 및 통신 기관. 역(驛)은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려 성종 때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이때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구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20년(1390) 중앙의 외방지역 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관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승제(驛丞制)를 조준(趙浚) 등 개국공신들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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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일명 옥천)과 학가산을 조망할 수 있는 수려한 정자인 쌍암정(일명 쌍암정려)는 옹천의 근대인물인 국전(菊田) 강형수(姜馨秀)가 건립한 정자이다. 이 정자에는 김흥락이 쓴 「쌍암정려기」와 김제면이 쓴 「쌍암정려기」, 이화성이 쓴 「쌍암정사기」가 게첨되어 있다. 쌍암정은 옹천마을 서당골에 위치한 사익재 근처에 있다. 사익재는 옹천리에서 학가산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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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천리는 마을에 용바위가 있고 옥계천이 흘러서 용전, 또는 옥천 등으로 불리다가 옹천이라 했다고 전한다. 옹천리에는 예부터 영천(靈泉)이란 유명한 우물이 있다. 진주강씨들의 서기가 어려 있는 사익재와 열녀각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영천과 관련하여 강신중 옹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쪽에 신령령(靈) 자, 샘천(泉) 자 쓰는 영천이라고 있어요.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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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사 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로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764번지 금계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 지역 사찰들은 예부터 봉황과 관련 깊은 전설을 여럿 지니고 있다. 봉황은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상상의 동물로 우리네 풍습과 문양, 풍수, 전설 등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상징의 하나이다. 안동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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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할아버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 어머니는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동생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이해는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계리(溫溪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간 후 어머니가 과부의 자식이란 말을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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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각은 금소에서 옹천강씨 집안으로 시집온 예천임씨 열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904년 고종이 내린 정려각이다. 열녀 예천임씨는 남편 강종헌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운명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무명지를 깨물어 남편에게 수혈함으로써 3개월간 더 살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운명했는데, 그 때 임씨 부인의 나이는 22세였다고 한다. 강신중 옹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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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소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농사를 짓는 데는 농경지 확보가 필수적으로, 금소는 넓은 들을 갖고 있어 농사짓기에 유리한 지역이다.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현 안동시) 읍지 『영가지(永嘉誌)』 관개조(灌漑條)에 금소보와 버리들보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금소가 다른 지역에 비해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일찍부터 시작했다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