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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 별신굿 때 말고는 쇳소리를 낼 수 없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A020303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재해

하회에서는 동제 또는 당고사라고 하여 서낭신에게 올리는 제의 외에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별신굿을 했다. 일반적인 의미의 별신굿은 몇 년에 한 번씩 무당들을 불러다가 하는 큰굿으로, 해마다 동신에게 동제를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하회마을의 경우에는 별도로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별신굿을 했다. 서낭당의 동신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산주(山主)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서낭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다가 서낭신의 계시가 내리면 별신굿을 하거나, 마을에 우환이 생겨 누군가의 입에서 별신굿을 해야 된다는 말이 나와서 풍문으로 퍼지게 되면 별신굿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별신굿은 마을에 무언가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회에서는 별신굿을 할 때만 쇳소리, 곧 풍물 치는 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마을에서는 탈놀이를 상것들의 놀이판이라 하여 양반들은 구경꾼으로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하회의 풍산류씨들은 별신굿을 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후원뿐만 아니라, 탈광대들의 신성성을 인정해 주고 깍듯이 예우를 했단다. 이를테면 양반광대가 대청에 올라와서 인사를 트고 말을 걸면 그 탈을 쓴 광대가 비록 자기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도 양반대접을 해주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풍물을 치는 지신굿을 할 때는 성의껏 음식을 마련하고 곡식을 바치며, 서낭대에다 마련한 옷가지를 걸고 음식상을 바치며 기도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서낭대에 옷을 걸고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신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은 풍산류씨들이 아랫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너그러움, 또는 민속문화의 전통을 인정하는 문화적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과 동신으로서 섬기는 마음도 함께 지녔음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별신굿을 할 때만큼은 대갓집을 드나들며 지신밟기도 했고, 양반들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탈놀이도 서슴없이 놀았다. 풍산류씨들이 모여 사는 양반마을이지만 별신굿을 할 때만큼은 서민들이 주인 노릇을 했던 것이다.

탈놀이를 할 때, 특히 양반·선비 광대들은 대갓집 사랑에 올라가서 주인과 맞담배질을 예사로 하며, 양반들에게도 높임말을 쓰지 않고 함부로 막말도 했지만, “범 같은 양반들도 별신굿 때만은 이런 수모에 너그러웠다”고 전한다. 탈을 쓰는 순간 광대들은 미천한 아랫것이 아니라, 양반·선비로 인정받은 것이다.

쇳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이때가 서민들에게는 해방일이나 다름없었을 터. 과거에는 집집을 돌아다니며 지신을 밟고 한 마당씩 탈놀이를 놀았다. 이것을 집돌이 별신굿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집돌이 별신굿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하회 별신굿탈놀이보존회에서도 탈놀이 공연은 하되 집돌이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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