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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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致明 |
영어음역 | Ryu Chimyeong |
이칭/별칭 | 성백(誠伯),정재(定齋),유치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주부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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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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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생년 | 1777년![]() |
몰년 | 1861년![]() |
본관 | 전주 |
대표관직 | 병조참판 |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할아버지는 류성휴(柳星休), 아버지는 류회문(柳晦文),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외증조부는 이상정(李象靖)이다. 아들이 세산(洗山) 류지호(柳止鎬), 손자가 수촌(水村) 류연박(柳淵博), 증손자가 일창(一滄) 류동시(柳東蓍), 고손자는 류광준(柳光俊)이다.
류치명은 외가인 안동부 소호(蘇湖,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 류범휴(柳範休), 정종로(鄭宗魯), 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장시도사(全羅道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가 되었고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楚山府使), 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었다. 1853년(철종 4) 가선대부에 오르고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같은 해 풀려났다. 1856년 가의대부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 해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류치명은 경학(經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해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無體的)인 실체(實體)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학맥으로 보면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이진상(李震相), 류종교(柳宗喬), 이돈우(李敦禹), 권영하(權泳夏), 이석영(李錫永), 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문집으로 『정재집(定齋集)』이 있으며, 저술로 『예의총화(禮疑叢話)』, 『가례집해(家禮輯解)』, 『학기장구(學記章句)』, 『상변통고(常變通攷)』, 『주절휘요(朱節彙要)』, 『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 『태극도해(太極圖解)』, 『대산실기(大山實記)』, 『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무실에 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초산 부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