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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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建銖 |
영어음역 | Gim Geonsu |
이칭/별칭 | 공립(公立),만회헌(晩悔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립(公立), 호는 만회헌(晩悔軒). 김경한(金景漢)의 현손, 현감을 지낸 김택동(金宅東)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정언을 지낸 김희성(金熙成), 아버지는 서추(西樞) 김재인(金在仁),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의 후손인 홍종해(洪宗海)의 딸이다.
김건수는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고, 이어 1834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장악원판사, 현풍현감 등을 두루 거쳤다.
현풍현감으로 재직할 때 창녕, 청도, 양산, 영산 4군을 함께 다스렸다. 당시 이들 군에서는 세금으로 내는 쌀인 세미(稅米)를 밀양에 속해 있던 삼랑포로 운송하여 한양으로 가는 운반선에 실었는데, 수로로 쌀을 운송하던 다른 군들과 달리 현풍과 청도 두 군은 지리적인 장애 때문에 육로로 운송하였다. 그런데 밀양군수가 세미 수송 문제를 빌미로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에서 현풍과 청도 두 군의 세미에 대해 종종 시비를 걸고는 하였다.
밀양군수의 탐학을 안 김건수는 바로 삼랑포로 달려가 담당 관리를 혼내고는 감영에 직보를 하여 일을 바로잡았다. 이 일로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김건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문을 닫고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된 데 이어 홍문관응교, 김해부사, 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만회헌집(晩悔軒集)』 6권 3책이 있다. 5세손인 김정진(金正鎭)이 쓴 후기에 따르면 원래 8권 4책이었으나 뒤에 6권 3책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묘소는 순흥(順興) 우수곡(愚叟谷) 오룡동(五龍洞, 현 경상북도 영주시 진위면 마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