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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흠(金舜欽)은 1840년 김경조(金慶祖)의 8세손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6세 때에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에는 스스로 시문(詩文)을 지을 정도였다. 12세에는 소학을 공부하여 충효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도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순흠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외출을 했을 때에는 비록 늦은 밤이더라도 동구 밖까지 나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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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지명유래는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오미마을표지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즉 원래는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으나, 허백당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릉동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일컫기도 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무(畝)’ 자를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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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김경조의 12세손으로 태어난 김재봉(金在鳳)은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1908년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09년 경성공업전습소에 입학하였다. 1912년 학업을 마치자 곧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김경조는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 1920년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조선독립단의 문서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입사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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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金應燮)은 1878년에 김경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한학을 배우고 1907년 한성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함흥재판소 검사를 역임했으며, 1909년부터는 영변구재판소 판사로 재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이듬해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강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만에 사직하고, 같은 해 7월 평양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가 대구로 사무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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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金萬秀)는 1893년 학호공파 김봉조의 10세손이자 김낙선(金洛璇)의 차남으로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심곡공파 김낙운(金洛雲)의 양자로 들어간 김만수는, 양부(養父)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18세에 풍산에 위치한 역동의숙(嶧洞義塾)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평소 나라 잃은 아픔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엿보던 김만수는 1915년 족친인 김응섭(金應燮)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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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가」는 유교적 전통과 종족의식이 강한 동성마을에서 주로 전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작품을 말한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집안에서 전해 오는 「세덕가」를 지은 사람은 김병철(金秉喆, 1881~1951)이라고 한다. 김병철은 김봉조(金奉祖)의 후손으로, 당대 손꼽히는 한학자였으며 숭조의식도 각별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덕가」는 김병철이 40세 되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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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조(金崇祖)는 1598년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8남으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624년 27세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나서, 형들의 권유로 대과를 목표 삼아 성균관에 유학했으나 2년 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낙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서 대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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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金祉燮)은 1884년 오미리에서 김숭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나 8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주가 뛰어나 천재라는 말을 듣곤 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907년 3월에 보통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5월 경상북도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909년 서울로 올라가서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서 일본어를 불과 1개월 만에 수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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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金應祖)는 1587년 영주에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6남으로 태어나 16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7세 때부터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613년 27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을 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크게 낙심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들어가 약 10년에 걸쳐 학문에만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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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조(金延祖)는 1585년 영주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8세 때 스스로 글을 지어 형제들과 친구들 앞에서 읊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는데, 다음은 김연조가 17세 되던 무렵 아버지 김대현한테서 온 편지글 내용이다. 스승에게 ‘中(중)’자를 써 달라고 하여 거처하는 방 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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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보면, 오미리는 태백산의 지맥을 이어받은 동쪽의 아미산(峨眉山)을 청룡, 서쪽의 도인산(道仁山)을 백호, 남쪽의 검무산(劍舞山)을 주작, 학가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 내리면서 솟은 북쪽의 죽자봉(竹子峰)을 현무로 하고 있다. 특히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거무산(일명 검무산)의 자태는 밑변이 편편하고 넓은 삼각산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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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金奉祖)는 1572년 한양 장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장남, 곧 팔련오계(八蓮五桂)의 맏형으로 태어났다. 1601년 3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 되던 해인 1613년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김봉조는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사시 합격을 한 이듬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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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金大賢)은 1553년 부친 김농(金農)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1602년 숨을 거두었다. 호는 유연당(悠然堂)으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김대현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살았던 그는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으로부터 글을 배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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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金榮祖)는 1577년 한양 장의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6세 되던 해에 부친을 따라 영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듬해인 7세부터 이웃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라는 사람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여타 학동들에 비해 총명함이 두드러져 “훗날 문호를 일으킬 사람이다.”라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김영조가 8세 되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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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춘유곡(春遊曲)」은 아녀자들이 봄이면 화전놀이를 하면서 읊었던 가사이다. 다음은 「춘유곡」의 전문으로, 오미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고, 또 고된 시집살이의 애환을 애절한 심정으로 구구절절 읊고 있다. 사시가절(四時佳節)얼마인고/ 삼월춘풍웃음이라 인생행락얼마인고/ 소년광음(少年光陰)제일이라 청가묘무방수하(淸歌妙舞芳樹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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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성향이 강한 집성마을인 오미리에서는 조상의 제례를 중시 여기는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그러다 보니 격식과 내용에도 비교적 큰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러나 가가례(家家禮)라는 말도 있듯이, 가문마다 예법이 다른 까닭에 적절한 지침을 세워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역시 다음과 같은 나름의 제례지침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1. 재계와 준비 예문(禮文)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