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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하회마을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 사람들의 최대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사람들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께서 “살아생전 하회 별신굿을 보고 구경했느냐?”고 묻는데, 이 때 구경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도 구경하지 못했느냐며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 굿 구경을 하고 오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였다. 그만큼 안동 지역 사람들에게 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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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이 말은 김해허씨가 터를 닦아 놓으니 그 위에다 광주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류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판을 벌였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씨들이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안씨들이 마을에 들어와 문중을 이루었으며, 다음으로 류씨가 잔치판을 벌일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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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의 길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삼신당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이 방사선형으로 뻗어 있어 방천과 농로 또는 마을 바깥으로 나가는 길과 만난다. 그리고 마을 외곽을 순환하는 도로가 방천길 및 농로로 이어져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중심부의 순환도로 사이에 또 하나의 순환도로가 있어서, 결국은 방사선의 길과 몇 겹의 순환도로가 만나서 거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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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양진당 종택에서는 입암 류중영과 그의 아들 겸암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신다. 한 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불천위로 모셔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불천위 제사는 다른 기제사와 어떻게 다를까? 겸암 불천위 제사의 절차에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자. 겸암 불천위 제사는 영신(迎神)-설소과(設蔬果)-출주고사(出主告辭)-참신재배(參神再拜)-강신례(降神禮)-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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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를 찾으면 마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문화해설사를 만날 수 있다. 문화해설사는 문화유적지에서 관광객에게 올바를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하회마을에는 현재 14명의 문화해설사가 일하고 있다. 하회마을 문화해설사들은 마을관리사무소에서 관광객들의 편의를 제공하는가 하면, 마을안내도 앞에 서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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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키는 동신에게 매년 동제를 지내는 것과 다르게 몇 년에 한 번씩 무당들을 불러다가 큰 굿을 하는 것을 별신굿이라고 한다. 하회에서는 동제 또는 당고사라고도 부르는 서낭신에게 올리는 제의 외에 5년 또는 10년에 한 번씩 별신굿을 했다. 원래 하회 탈놀이는 별신굿의 한 부분으로 마을 주민들에 의해 행해졌던 놀이이다. 별신굿의 한 부분으로 행해졌던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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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말로 전승되는 민간 지식의 총체. 문화의 전승에는 전승 매체와 방식에 따라 구비전승·행위전승·물질전승 등이 있다. 구비전승은 행위나 물질이 아니라 말로 전승되는 문화를 뜻한다. 말로 전승되는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비문학이다. 그러나 구비전승 이전에 말로 소통되는 경험담·목격담·풍문 등의 구술 정보가 있는가 하면, 구비전승은 되지만 문학적 형상성을 갖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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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도령 전설과 하회 별신굿 탈놀이, 서낭신을 위한 동제 등은 모두 서낭신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하회마을만의 독특한 문화이다. 달리 말하면 하회마을에서는 지금도 서낭신과 관련한 전설과 민속신앙이 풍부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셈이다. 서낭신과 관련하여 형성된 문화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하회마을 사람들은 서낭신만을 모시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회마을 사람들은 서낭당과 함께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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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하회를 찾아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수려한 자연환경 때문이다.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와 흰 무명베를 펼쳐 놓은 듯한 깨끗한 백사장, 그리고 만송정의 푸른 솔숲과 깎아지른 듯한 부용대 절벽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경관은 누구든 한 번쯤 둘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마을 입구를 시작으로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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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의 대표적인 산 꽃뫼(일명 화산(花化))는 꽃내(일명 화천(花川))과 함께 산태극수태극의 형국을 이룬다. 꽃뫼는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의 한 지맥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낙동강과 만나면서 머무른 해발 271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회는 이 꽃뫼 자락의 매듭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꽃뫼의 지맥이 충효당 뒤뜰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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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육로는 큰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유일하다. 이렇듯 육로는 하나뿐이지만 꽃내가 마을을 감싸 돌아나가는 덕분에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물길이 많다. 그래서 몇십 년 전만 해도 하회마을 사람들은 나룻배로 건넛마을인 월애와 광덕을 오갔으며, 강물이 적은 철에는 소나무로 만든 섶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렇게 본다면 하회를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서너 길이나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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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는 하회마을보존회라는 모임이 있다. 마을문화를 온전하게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회마을 사람들의 자치모임으로 공공기관인 하회마을관리사무소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모임에서는 마을 보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마을일에 직접 관여하기도 한다. 류한승 씨는 2007년부터 하회마을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하회에서 태어나 13세에 학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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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宗孫)이란 종가(宗家)의 대를 잇는 사람을 말한다. 과거에는 종손의 명예와 주어진 권한이 상당히 컸다. 명예와 주어진 권한이 큰 만큼 종손이 감당해야 할 책임 또한 막중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회마을에서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류상붕 씨는 하회마을 입향조로부터 22대, 겸암 류운룡 선생으로부터는 16대 종손이다. 그는 종손이란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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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는 예부터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각 성씨마다 전해지는 입촌 전설과 함께 하회마을 세거사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피 천석 전설」은 허씨 다음으로 하회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진 안씨들의 내력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고려시대 가난한 안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는 행각승을 만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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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손과 종부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종손과 종부는 여느 집보다 많은 조상들의 제사를 모셔야 하고, 집에 찾아오는 많은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등 가문의 크고 작은 일들을 책임져야 하는 중책을 맡은 이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종손과 종부는 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애파 16세손의 안사람인 상주댁은 서애 종손과 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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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 종가에는 한 집에서 세 명의 불천위가 탄생했다. 입암공 류중영(柳仲郢)과 문경공 류운룡(柳雲龍), 문충공 류성룡(柳成龍)이 그 주인공들이다. 불천위 제사란 일반적으로 4대조까지만 올리는 제사의 관례를 깨고 5대조, 6대조가 되어도 그 후손들이 끊임없이 계속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제사를 말한다. 이것을 불천위라고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집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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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로 들어서서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골목길을 들어서면 하회보건진료소가 보인다. 보건진료소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주변의 고가(古家)와 어울려 이곳이 보건진료소가 맞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보건진료소라고 하면 으레 번드르르한 현대식 건물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회마을보건진료소는 아담한 크기의 한옥이다. 대문마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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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풍산류씨 서애파 종부 최소희 할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최소희 할머니는 스무 살 때 하회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집을 오기 전 할머니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한국전쟁으로 시국이 혼란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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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정숲 은 마을의 북쪽, 부용대 앞으로 흐르는 꽃내 옆에 만들어진 푸른 솔숲이다. 이 만송정숲은 마을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홍수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내는 풍수지리적인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만송정숲은 조선 전기 선조 때 겸암 류운룡이 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에 이른다고 전한다. 마을에는 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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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았을까? 풍산류씨가 하회에 자리 잡은 것은 고려 후기이다. 겸암과 서애의 6대조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가 풍산 상리(上里)에 세거하다가 길지를 찾아 지금의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실 류씨들이 하회에 세거지를 마련한 것은 전서공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기 훨씬 이전, 곧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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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는 다른 마을과 다르게 일생을 다해 서낭신을 모시는 산주(山主)가 있다. 옛날에 산주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서낭당에 올라가 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으며, 섣달 보름에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 몇십 년 전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산주는 서낭신이 꿈에 나타나는 등 신비한 현상을 통해 계시를 내려서 정해 준다고 믿었다. 신의 계시를 받아야 산주가 될 수 있을 만큼, 산주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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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풍산류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따라서 마을 안에 풍산류씨 일가들을 묶어주는 화수회(花樹會)와 족회소(族會所), 양로소(養老所), 종당계(宗堂契) 등의 모임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류씨 일문을 대표하는 가장 광범위한 문중모임이 화수회이다. 화수계(花樹契) 또는 대문회(大門會)라고도 불리는 화수회는 친목도모와 선조의 유물관리, 제사 및 묘사 봉행, 위토 및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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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생활 풍속. 안동은 조선시대에 유교문화가 강성했던 지역으로 반촌과 문중 조직, 서원 등을 통해서 양반문화와 선비문화가 뿌리를 깊이 내린 곳이다. 민속은 민촌의 마을 공동체와 그 주체인 민중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자생적인 전통문화이자 민주적인 생산문화로서, 양반들의 유교문화와 맞서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유교문화가 발전한 만큼 상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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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큰 종가인 양진당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과, 솟을대문 옆으로 난 길로 가서 안채로 들어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양진당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솟을대문은 주로 사랑채를 출입하는 어른들이 사용하고, 일꾼들이나 안어른들은 안채로 바로 들어서는 솟을대문 옆의 문을 주로 사용했다. 손님이 왔을 때 대문 앞에서 기척을 하면 집사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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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년 전까지도 진달래꽃이 피는 봄이 오면 하회마을 아녀자들은 화전놀이를 즐겼다. 화전놀이는 평소에 자유롭게 놀이를 즐길 수 없는 아녀자들이 1년에 한 번 화전(花煎)을 지져 먹고 실컷 노는 자리였다. 화전이란 꽃잎을 붙여 만든 부침개이다. 찹쌀가루를 잘 반죽해서 기름을 두르고 지진 떡으로 계절에 따라 진달래꽃이나 배꽃, 국화꽃 등을 얹어서 부치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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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에서 큰 종가와 작은 종가인 양진당과 충효당 못지않게 솟을대문을 세우고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고가가 마을 북쪽에 있는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이다. 본채가 불타 버린 남촌댁과 함께 북촌댁은 하회의 아랫마을과 윗마을 또는 남촌과 북촌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동쪽 방향으로 서 있는 북촌댁의 솟을대문은 하회에서 가장 우뚝하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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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까지 하회탈은 마을 동사(洞舍)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이 동사가 불에 타서 이제는 그 터만 남고 동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동사에 보관했던 하회탈은 지금껏 무사하다. 그 때는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기 이전이었다. 국가에서 하회탈에 대한 아무런 가치 부여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동사가 불길에 휩싸이자 ‘탈을 태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누군가 동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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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만송정숲 앞 모래사장과 마주보고 있는 부용대의 절경은 세계적인 명소로 꼽힐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부용대 앞 쪽에는 여러 개의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옥연정사에서 부용대로 가는 문을 나서면 평평한 바위를 만나는데, 바로 능파대이다. 능파대는 서애 류성룡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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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풍수지리에서는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상을 이상적인 길지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길지는 흔하지 않은데, 특히 마을의 입지로는 더욱 희귀한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산태극수태극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 물줄기가 마을을 지나면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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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입구에 마련된 장승공원에는 온갖 표정의 장승 250여 기가 세워져 있다. 그곳이 바로 목석원인데, 사람들은 목석원에서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하나는 가지각색의 얼굴을 한 장승들을 보고 놀라고, 또 하나는 그 장승들을 깎아 세운 김종흥 씨를 보고 놀란단다. 김종흥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 별신굿 탈놀이 이수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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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이나 가문의 지체와 상관없이 하회마을 사람들을 평등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동제 또는 당제를 주목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하여 동신을 모시는 당(堂)이 다섯 개나 된다. 그 중 세 개의 당은 서낭당과 국사당·삼신당이며, 각각 상당·중당·하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두 곳의 서낭당은 상당으로도 불리는 서낭당이나 국사당과는 달리 화산의 지맥을 따라 형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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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의 선유줄불놀이는 집성반촌의 선비문화와 마을을 끼고 도는 화천, 부용대의 절벽이 어우러진 하회마을만의 독창적인 놀이이다. 상민들이 무교적 전통에 따라 하는 별신굿 탈놀이와 달리, 양반들이 유교적 전통에 따라 시를 짓고 음주를 즐기는 선상시회(船上詩會)의 풍류였던 셈이다. 선유줄불놀이는 음력 7월 보름 밝은 달밤 부용대와 화천, 백사장, 만송정숲 등에서 열렸다.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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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하회마을이 널리 알려진 일이 있었다. 한국야쿠르트가 기업의 선호도를 높이기 위해 장수마을과 야쿠르트의 이미지를 결합한 ‘장수마을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그 중 한 편이 하회마을을 배경으로 했던 것이다. 이 캠페인으로 하회마을은 장수마을의 이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회마을이 한 기업 광고의 배경이 된 까닭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예스러운 하회마을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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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21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영국여왕이 한국의 많은 곳을 제쳐두고 하회마을을 찾은 까닭은 무엇일까? 하회마을은 고려 후기부터 다양한 성씨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풍산류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살아 있는 마을이다.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민속촌과 다르게 하회마을은 주민들의 터전이자, 각종 문화유산들이 보존·전승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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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서는 연꽃이 물에 뜬 것 같은 형상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여 길지로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런 형상을 한 마을이 있을까. 예부터 풍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회마을의 형국을 풍수지리적으로 다양하게 일컫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해석이 연화부수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낙동강 물줄기가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마을이 물 위에 오롯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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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에는 각종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유교적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유적들은 하회의 집과 서원, 정자 등이 중심을 이루며 유물들은 주로 서애 류성룡이 남긴 것으로 현재 영모각(永慕閣)에 전시되어 있다. 영모각은 1965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6월에 준공한 서애의 유물 전시관으로, 유물을 모두 보존 전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서 1975년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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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건축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양식의 집들이 시대별로 갖추어져 있다. 하회마을 형국이 산태극수태극의 음양을 아우르는 태극형이듯, 마을 안의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소박한 초가지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하회에 들어서면 우람스러운 솟을대문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띤다. 이는 전통시대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많고, 유학자가 많으며, 불천위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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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서는 얼굴이나 집터, 묏자리 따위의 겉모양과 생김새의 특징을 ‘형국(形局)’이란 말로 대치하여 많이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회의 전체적인 모양은 연화부수형 또는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는 ‘태극형’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며, 또는 배가 떠나는 형국이라 하여 ‘행주형(行舟形)’이라고도 말한다.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형상인 연화부수형을 옆에서 보면 행주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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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고려 후기 이후 지금까지 풍산류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하회가 전국 각지에 양반마을로 알려지면서 나아가 명문세가의 마을로, 또는 유교문화의 전형적 마을로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겸암과 서애로부터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겸암과 서애에 얽힌 전설도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데, 전설 속에서 겸암은 한결같이 이인(異人)으로 묘사되어 서애보다 탁월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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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은 효자이자 이인(異人)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겸암은 퇴계가 향리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퇴계 또한 그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함에 감복하여 총애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부용대 남쪽 기슭에 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할 때 ‘겸암정사(謙巖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퇴계였다. 겸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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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은 겸암 류운룡의 아우로서 임진왜란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 때의 명신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학자이다. 21세에 형 겸암과 도산서당을 찾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고, 23세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며, 성균관에 입학하던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서애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고향의 전원과 독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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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양반집의 가장 큰 일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이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효가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효를 실천하기 위해 죽은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대부의 일상생활에서 ‘봉제사’는 무엇보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제사에는 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지내는 기제(忌祭), 명절과 초하루, 보름 이외에 특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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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 전통적인 관혼상제 의식이 최근까지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른 마을에서 흔하게 보기 어려운 불천위(不遷位) 제사 덕분일 수 있다. 불천위 제사란 일반적으로 4대조까지만 올리는 제사의 관례를 깨고 5대조, 6대조가 되어도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위패를 모셔 두고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제사를 말한다. 불천위의 자격은 학문이 탁월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한 대학자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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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보면 농촌마을에서 주민들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사람이 항상 등장한다. 바로 마을을 대표하는 심부름꾼, 이장님이다. 하회마을에도 주민들의 불편함을 가까이에서 들어주는 이장이 있다. 2006년부터 하회마을 이장으로 주민들을 대표하고 있는 류대근 씨다. 하회마을 이장 류대근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맏이로서 연로한 부모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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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회마을이 풍산류씨 집성촌이기에 당연히 종가도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짐작과 다르게 하회마을에는 두 종택(宗宅)이 있다. 바로 겸암파와 서애파의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이 한 마을에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겸암과 서애는 입암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장남과 차남으로, 형제가 한 마을에서 종가를 이룬 것이다. 보물 제306호로 지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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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각각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것이 겸암정사(일명 겸암정)과 옥연정사(일명 옥연정)이다.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는 우뚝 솟은 부용대를 마주보고 자리 잡고 있다. 부용대를 마주보고 왼쪽에 자리 잡은 겸암정사는 낙엽이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 여간해서는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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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에서는 동제 또는 당고사라고 하여 서낭신에게 올리는 제의 외에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별신굿을 했다. 일반적인 의미의 별신굿은 몇 년에 한 번씩 무당들을 불러다가 하는 큰굿으로, 해마다 동신에게 동제를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하회마을의 경우에는 별도로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별신굿을 했다. 서낭당의 동신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산주(山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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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는 마을 전체가 문화재이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라는 말은 하회에 공부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을을 보는 데는 여러 가지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 갈래를 넷으로 잡는다면, 우선 마을의 연혁 또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마을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마을의 조직과 구성을 보아야 한다. 셋째는 문화적 전통을 보아야 한다. 넷째는 마을의 자연 경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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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 전해 오는 허도령 전설은 하회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허씨들의 내력과 하회탈이 생겨난 까닭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하회탈과 별신굿이 허씨들이 마을에 자리 잡고 살 때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서낭당과 같은 동신당이나 동제와 같은 공동체 단위의 제의도 허씨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허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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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도 풍산류씨 종택인 양진당 안채에 들어서면 높이 보이는 처마 밑으로 시렁 위에 나란히 얹어놓은 수십 개의 소반(小盤)이 눈에 띄었다. 모두 제사 때 사용되는 소반들로, 지금은 양진당 전체를 공사하는 중이라 그 풍경을 볼 수 없지만 보수가 끝난 뒤에는 다시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예부터 어느 집안이든 종가는 제사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종가에서 해야 하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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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 탈놀이는 오랜 옛날부터 별신굿의 한 부분으로 연행되었다. 그런데 이 하회 별신굿은 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비는 믿음이나 속신과 상관없이 우리 민속극사와 무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를 지니고 있다. 하회마을 별신굿은 한국 농촌 별신굿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서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동신을 중심으로 한 별신굿은 동해안의 어촌에 몇 군데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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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탈은 그 자체로 하회마을의 문화적 상징일 뿐 아니라 안동의 문화적 상징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문화의 상징이다. ‘안동’ 하면 하회마을이 떠오르고 ‘하회마을’ 하면 하회탈이 떠오를 정도로 우리 전통예술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회탈은 한국탈의 대명사 구실을 하면서 하회마을의 관광 기념품으로 남다른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하회와 병산에서 전해 오는 하회탈의 경우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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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도령은 꿈속에서, 탈을 만들어 탈춤을 추면 마을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12개의 하회탈을 깎았다.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회탈은 이렇게 허도령 전설과 함께 전해 오고 있다. 초월적인 힘에 기대어 탈을 깎아야 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마을을 지키며 하회탈을 깎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하회동탈박물관장이자 하회탈을 깎는 공예가 김동표 씨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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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풍산류씨 문중에서는 3년에 한 번 음력 10월 10일 오전 10시가 되면 회전합사(會奠盒祀)를 지낸다. 회전합사는 음력 10월에 5대조 이상의 묘소를 찾아 제사지내는 시향제(時享祭)와는 성격이 다른데, 내력은 다음과 같다. 조선 중기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형제와 두 사람의 아버지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이, 후손들이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