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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마을의 근대사를 담고 있는 ‘일록(日錄)’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20301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미영

오미리에는 근대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록(日錄)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을미년과 병신년에 발생한 안동 의병운동을 기록해 둔 이른바 『을미병신일록』이 가장 주목된다. 『을미병신일록』의 저자는 김정섭(金鼎燮)이다. 그는 병신년에 예안 의진에서 의병부장으로 활동했던 이중린(李中麟)의 사위이면서 동시에 영감댁의 주손이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했던 김응섭(金應燮)의 형이기도 하다.

『을미병신일록』은 1895년 4월부터 1898년 2월 2일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은 1895년 8월 19일에서 1896년 7월 3일까지이다. 김정섭은 말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해 두고 있다.

이 일록은 창의(倡義)할 때에 보고들은 바에 따라 힘써 기록한 것이다. ……(중략)…… 곧바로 써서 숨기지 않았고 조금도 거짓이나 허망한 말은 없다. 다만 문견이 넓지 못하여 군기(軍機)가 소략하고 빠진 것이 십중팔구이니 이것이 한스럽다. 본진(本陣)이 조금 상세한 것은 가까워서 날마다 들어서이고, 각진(各陳)이 매우 소략한 것은 멀어서 알기 어려워서이고, 호좌(湖左, 충청북도)를 자주 언급한 것은 왕래가 계속되어서이고, 하향(下鄕)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행로가 막혀 끊겨서이다. 아! 이 일은 실로 천지에 다하는 대의의 거사인데 잘 조처하지 못한 일이 많이 있어서 다만 청구(靑丘)에 열사가 없다는 탄식만 절실하다. 그러나 천운은 힘으로 회복할 수 없고 비록 심각한 원수를 흔쾌히 보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의관을 보전하고 두발을 온전히 한다면 영원히 천하 만세에 훌륭하다는 말이 남을 것이니 그 공로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내용을 보듯 김정섭의 『을미병신일록』은 의병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풍문을 통해 들은 사실을 기록해 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의병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지역은 이른바 호론(虎論)을 대표하는 의성김씨전주류씨였다. 그러다 보니 병론(屛論) 계열의 가문들은 자연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미리풍산김씨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병론을 대표하는 하회리풍산류씨에 근접해 있었는데, 이런 배경에서 보다 적극적인 척사의병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마을 안에서 3~4명이 면회(面會) 모임에 참여하니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호계통문(虎溪通文)과 임천(臨川)의 사통과 예안 향교통문이 함께 회의자리에 이르렀다. 향회의 적임자를 정할 때에 풍서면에서 각각 한 사람이 도착하고 혹자가 우리 문중에서 적임자를 내고자 하니 하회면의 몇 사람이 극력 저지시켰다. 이것이 어찌 사적인 혐의를 쓸 때인가!

그러나 한편, 이런 상황에서도 오미리풍산김씨는 의병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의병활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을미병신일록』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소(義所)에서 쓰일 자금을 배분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백 냥을 의군의 자금으로 선납하였는바 해마다 비용을 낸 나머지여서 빈손으로 이를 메워야 한다는 생각에 큰 고민이었다. ……(중략)……

읍의 하인이 와서 외래 의병 두 부대(예안과 영주)를 접대하는 일로 각 문중에 돈을 배당하니 2천 금이었다. 우리 문중은 2백 냥으로 독촉을 심히 급하게 하였다. ……(중략)……

우리 문중에 배당된 금액 2백 냥을 부대에 보냈다. 영천(영주) 서기 두 사람이 척후병으로 차출되어 와서 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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