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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20106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오미리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 오는 것으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 있다. 2009년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는 『세전서화첩』의 편찬자는 김중휴(金重休)로, 1797년 오미리에서 태어나서 1863년에 숨을 거두었다.

『세전서화첩』은 건(乾)과 곤(坤)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로 26.5㎝, 세로 36.0㎝이다. 수록된 그림은 풍산김씨 10세부터 20세까지 모두 11세대(世代)에 걸친 19명에 대한 것으로, 모두 31화(畵)로 이루어져 있다. 건권에는 제1화부터 제17화까지, 곤권에는 제18화부터 제31화까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각 그림 뒤에는 시문(詩文)이 첨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주인공의 인적사항과 출생 및 성장과정, 인물의 성향, 그림의 배경과 내용 설명 등이 기재되어 있다.

아울러 그림 뒤에 붙인 시문에는 누가 어떤 연유로 어떤 장면을 그렸다는 내용이 적힌 것이 모두 8점이 있는데, 이로 볼 때 김중휴풍산김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던 기존의 그림을 참고로 하여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곤권 마지막 부분에는 1825년 봄 김중휴의 종질인 김봉흠이 작성한 「서화첩후(書畵帖後)」, 1864년 봄 여강이씨 이재영이 쓴 「도첩후서(圖帖後序)」, 1863년 5월 사종 아우 김중범(金重範)이 쓴 「서화첩 발문」이 차례대로 덧붙어 있다. 『세전서화첩』에 실린 19명의 인물과 31화의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화 -진산공「대지도박도」

진산공 김휘손이 하양현감으로 있을 때 안동에 성묘를 하러 왔다가 예천 산음리의 부호 박씨와 ‘내기 장기’에서 이겨 대지산(大枝山)을 얻게 된 내력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제2화 -허백당공 「동도문희연도」

김양진김안로의 배척을 받아서 1526년 경주부윤으로 나갔을 때, 맏아들 김의정이 문과에 합격하자, 지인들을 초청하여 문희연(聞喜宴)을 열면서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다.

제3화 -허백당공 「완영민읍수도」

김양진이 전라도관찰사를 그만두고 떠나올 때 지방의 사대부 자질(子姪)들이 구름같이 교외로 모여들어 울먹이며 뒤따르고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제4화 -허백당공 「해영연로도」

1529년 김양진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큰 흉년을 만났으나 백성을 구제한 후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제5화 -잠암공 「잠암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미리에 머물고 있던 김의정에게 퇴계 선생이 찾아와서 안심하라는 말로 위로하였는데, 이에 김의정이 수시(愁詩)10운을 보내자 퇴계가 답시(答詩)를 짓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제6화 -화남공 「고원연회도」

1536년 봄 김농이 선원전(璿源殿) 참봉을 제수 받고 북관(北關, 함경도)으로 들어갔는데, 소식을 듣고 친구 고원군수 이흔(李忻)이 망경루(望京樓)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는 장면이다.

제7화 -화남공 「반구정범주도」

1575년 김농이 축산현감으로 있을 때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웃 고을 수재(守宰)들과 늦봄 26일 한자리에 뱃놀이를 하면서 노는 장면이다.

제8화 -화남공 「낙고의회도」

1554년 김농이 편지를 보내 ‘세회(世會)’, 일명 세계회(世契會)를 결성했는데, 그 해 여름에 낙고연사(洛皐淵榭)에서 첫 모임을 가진 장면이다.

제9화 -유연당공 「천조장사전별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2월 명나라 장사(將士)가 돌아가려 하자 훈련원에서 연회를 베풀고, 임금이 문무백관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까지 따라가 전송한 다음 준마와 직물, 필묵 등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장면을 네 폭의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제10화 -유연당공 「칠송정동회도」

서울 명례방(明禮坊) 뒤에 자리한 ‘칠송정’이라는 일곱 그루 소나무 아래에서 동도회(同道會)를 개최하는 모습이다.

제11화 -유연당공 「환아정양로회도」

1601년 산음현감으로 부임한 김대현이 70세가 넘은 노인들을 불러 환아정(換鵝亭)에서 양로연을 베풀어 음악을 들려주고 지팡이를 나눠 주는 장면이다.

제12화 -둔곡공 「조천전별도」

1619년 김수현이 임금의 탄신을 축하하는 천추사(千秋使)의 부사로 명나라로 가게 되자, 공경대부와 여러 선비들이 거리 밖까지 나와서 전송하는 장면이다.

제13화 -학호공 「범주적벽도」

김봉조가 강성(江城) 적벽(赤壁) 아래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제14화 -학호공 「단성연회도」

1616년 김봉조가 단성현감으로 부임하여 단소루(丹霄樓)에서 연회를 열고, 또 양로연을 개최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제15화 -망와공 「가도도」

1623년 김영조가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에게 문안을 드리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제16화 -망와공 「항해조천전별도」

1633년 김영조가 왕명을 받고 세자 책봉을 위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동지성절사(冬至聖節使)를 겸임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제17화 -장암공 「제좌명적도」

김창조의 꿈에서 아버지 김대현이 들려준 이야기를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18화 -심곡공 「촉석루연회도」

이민구(李敏求)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가을철 순시를 할 때 김경조가 도내 인사들을 불러 진주 촉석루에서 큰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다.

제19화 -심곡공 「심천초려도」

김경조가 병자호란 당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오미리로 돌아와, 학가산 뒤에 있는 심천구장(深川舊庄)에서 오막살이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20화 -심곡공 「회곡정사도」

회곡(檜谷)의 산수를 사랑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손자를 비롯한 후진을 양성하다 회곡에서 숨을 거둔 김경조를 그려 놓았다.

제21화 -광록공 「성학도」

1601년 김연조가 아버지 김대현이 산음현감으로 부임할 때 존심(存心)·양성(養性)·지경(持敬)·주정(主靜)이라는 여덟 글자를 보이고 이것이 ‘입도적결(入道的訣)’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제22화 -학사공 「선회도」

1634년 김응조학가산(鶴駕山) 북쪽 사천(沙川) 위에 정자를 짓고 학사(鶴沙)라고 했는데,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제23화 -학음공 「과천창의도」

1635년 김염조가 과천현감으로 있었는데, 이듬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24화 -설송공 「분매도」

김숭조가 지인들과 함께 매화 화분을 감상하는 모습이다.

제25화 -일용재공 「명옥대도」

김영조의 셋째 아들 김시침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봉정사 입구에 층층으로 솟은 바위가 있는 명옥대(鳴玉臺)에서 머물렀는데, 그 명옥대의 풍광을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26화 -죽봉공 「감로사연회도」

김간이 황산도(黃山道) 찰방으로 있을 때인 1712년 9월 3일 경상남도 밀양의 감로사(甘露寺)에서 연회를 베푸는 장면이다.

제27화 -죽봉공 「죽암정칠로회도」

1724년 봄 김간이 친구 6명과 함께 죽암정(竹巖亭)에서 칠로회(七老會)를 결성하여 놀고 있는 장면이다.

제28화 -죽봉공 「무신창의도」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했을 당시 김간이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내용을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29화 -희구재공 「치자래도」

김간의 맏아들 김서운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1724년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영남좌도안렴사가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치자래설(雉自來說)」이라는 그림을 그려 보내 주었는데, 그 내용을 묘사해 둔 그림이다.

제30화 -창송재공 「창송재도」

김서한이 살던 창송재의 풍광과 지인들과 교유하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제31화 -모죽헌공 「한진읍전도」

죽봉 김간의 손자인 김유원이 과거시험에서 눈이 어두운 노인을 측은하게 여겨 자신의 답안지를 건네주었는데, 그 노인과 한강 나루에서 울면서 작별하는 광경이다.

『세전서화첩』은 오미리 풍산김씨 입향조 김휘손과 허백당 종택을 창설한 불천위 김양진, 풍산김씨의 중흥조로 인식되고 있는 불천위 김대현, 그리고 가문의 영달을 꾀했던 팔련오계(八蓮五桂)로 불리는 김대현의 여덟 아들과 이후 불천위로 추대되어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김간으로 이어지는 혈통적 연결고리를 묘사한 서화첩이다.

『세전서화첩』은 이렇듯 풍산김씨 조상들의 위업을 드러냄으로써 가문의 위세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후손들에게 조상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려는 교육적 목적 등을 지니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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