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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향한 충성심에 불탄 김응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205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김응조(金應祖)는 1587년 영주에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6남으로 태어나 16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7세 때부터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613년 27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을 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크게 낙심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들어가 약 10년에 걸쳐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후 1623년 37세에 문과급제를 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고 나서 1634년 홀연히 관직에서 물러나 영주 갈산(葛山, 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에 허물어진 정자를 구입하여 수리하고는, ‘학사정사(鶴沙精舍)’라고 이름 붙이고 ‘학사’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다음은 당시 김응조가 지은 「학사정사기(鶴沙精舍記)」의 일부분이다.

서북쪽 언덕에 옛날 임씨(林氏)의 정자가 있었는데 임씨는 가고 정자가 비어 있은 지 50여 년이다. 내가 소 한 마리로 이 정자를 사서 잘 다듬어 수리하고 앉아서 바라보니 흰 모래판 맑은 냇물이 감아 안았고 푸른 산이 병풍을 둘러 마치 그림인 양 아름답다.

스스로 산림에 의탁하겠다는 이들도 명리(名利)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면서도 말로만 세상을 벗어났노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또 산수를 즐긴다는 이들 역시 경물(景物)에 구속될 뿐이다. 물론 도덕을 지니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뜻을 함께 한 선비들과 더불어 산림에 숨어 도(道)를 강구함으로써 즐거움을 삼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나는 재주가 없고 옹졸하여 세상에 어울릴 줄 모르기에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한 지 20년이 되었으나 이바지한 바가 아무것도 없었으니, 차라리 강호에 물러 앉아 낚시나 일삼으며 혹 흥취가 나면 성덕(聖德)을 노래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을 삼겠다.

나는 본래 말주변이 없어 입을 열면 중심을 잃게 되고 행동이 둔하여 움직이면 온당함을 저버리게 되니, 차라리 조용한 곳에 머물면서 세속과 인연을 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허물을 줄일 것이라.

그야말로 산림처사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대현의 아들 8형제 중에서 김응조의 기개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당시 스스로 처사로서의 삶을 기약했지만, 청나라의 거듭되는 위협으로 인해 조정이 위태로워지자 1635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그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둘째 형 김영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되자, 또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영주로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행여 중국 달력을 손에 넣으면 연호를 지워 버리는 강단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인조를 마주하며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처해 있을 때 인조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이때 김응조는 “지금의 원인은 왕실과 세도가(世道家)에서 백성의 이(利)를 빼앗음이요, 아문(衙門)과 영문(營門)에서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겼음이요, 고을 수령들이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이에 인조는 “내가 아직까지 미처 듣지 못했던 훌륭한 말이로다. 내 마땅히 오늘의 그대 말을 적어서 기억해 두리라.” 하면서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한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에게는 더 없는 사랑을 베푸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김응조가 장손(長孫) 김휘도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휘도에게

약을 먹고 나서 효험이 어떤지 늘 마음에 걸리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불효하다고 나무랐더구나. 내 마음에 측은함이 있구나. 자식이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 뜻을 받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제 몸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부모께 욕됨을 끼치지 않는 것과 욕망을 절제하고 질병을 조심하여 부모께 걱정을 드리지 않는 것이 바로 효도의 가장 기본이다. 그렇지 않고 맛난 음식으로 몸을 봉양하는 따위는 효도에 있어서는 하잘 것 없는 일이다. 너는 아이 때부터 막된 말이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 다시 질병을 조심하니 내가 일찍부터 그런 점을 기특히 여기고 좋아했다. 무엇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를 탓하느냐? 다시 충분히 노력을 기울여 깨끗한 마음으로 일을 살피고 책을 통해 이치를 밝혀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심경(心經)』 한 권을 먼저 보내니 이를 읽어보면 남자의 포부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만 줄인다.

스스로 불효를 하고 있다고 자책하는 손자를 위로하면서 군자(君子)로서의 올바른 길을 깨우쳐 주는 모습이 매우 정겹게 느껴진다. 김응조는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67년 향년 81세로 눈을 감았다. 향내 유림들에 의해 불천위로 추대되었으며, 현재 봉화 오록리에 위치한 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아울러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예천 물계서원(勿溪書院)과 영주 의산서원(義山書院)에도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h********* 김응조공님은 대단하십니다. 학사정사를 세우시고 수락대 모임을 주선하여 유학 문화 진작에 노력하시고 아마 이때 수락대 구곡도 만들어 졌지 싶네요 한편 관현리(예천온천마을)에 있는 물계서원에 81세로 배향되었답니다. 물계서원 어릴 때 들은것 같은데 저는 우리 동네석송령 근처 앞산에 위치한다 들은것 같은데요 감천면 사무소에 물계서원 유사 명단등 자료가 있다던가
  • 답변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예천 물계서원과 영주 의산서원 쪽으로 직접 문의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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