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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B0102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양명

농사가 주업인 농촌 지역에서 농업용수의 확보는 생계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농지가 아무리 넓어도 물의 공급이 적절치 못하면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철 고루 비가 내린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장마철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한반도의 기후 특성상 매시기 물 걱정 없이 농사짓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인위적으로 저수지나 보, 관정 등의 수리시설을 통해 관개를 용이하게 한 지역도 했다. 특히 금소천(일명 길안천)을 끼고 있는 금소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보를 축조하고 봇도랑을 만들어 가뭄과 홍수에 대비했다.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현 안동시) 읍지 『영가지(永嘉誌)』에는 “금소관개는 임하현 서쪽에 있고 그 발원지는 보현산…… 버리들 관개는 임하현 서쪽에 있고 그 발원지는 보현산”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금소는 새들보에 의한 관개로 오곡과 잡곡이 두루 풍성하며 버리들 역시 내를 끌어들여 관개함으로써 오곡과 잡곡이 모두 풍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가지』가 편찬된 시기로 미루어 17세기 이전부터 금소에 보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소천은 수량이 많고 흐름이 완만하여 보를 만들기에 적당하다. 주민들이 이용했던 보는 동쪽으로부터 버리들보·새들보·베일보·널목보·금소보·신덕보 등인데, 모두 수량이 풍부하다.

특히 금소들의 관개에 사용되었던 금소보는 물길이 3㎞나 될 정도로 규모가 큰데다 동쪽 산자락을 거쳐 마을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어 주민들이 생활용수로 많이 사용했다.

금소보는 ‘이쪽 들’, 즉, ‘우리 마을 쪽 들에 있는 보’라고 해서 ‘이들보’라 부르기도 한다.

금소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물의 원활한 이용을 위해 보를 만들고 물길인 봇도랑을 조성했다. 봇도랑은 마을의 동쪽 입구인 독골을 지나 마을로 들어온다. 그러면 독골의 계곡물과 봇물이 열십(十)자 모양으로 만나게 된다.

이 물이 마을 중심부를 빠져나갈 때면 시이골의 계곡물과 같은 방식으로 만난다.

물길의 교차를 피하고 홍수 때 계곡의 범람을 막기 위해 봇물은 계곡물이 흐르는 물길 밑으로 교차하여 흐르도록 만들어 두었다.

금소에서는 보의 축조뿐 아니라 봇도랑과 계곡물을 원활히 통제하기 위한 도랑공사 및 제방공사 역시 충실히 이루어 놓았다. 한편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방은 마을 영역을 경계 짓는 구실을 하는데, 특히 봇도랑의 경우 마을을 남북으로 구분해 주고 있다.

이처럼 일찍이 여러 개의 보를 축조함으로써 가뭄에도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했기에 금소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다. 대신 보의 안전과 풍부한 물 공급을 기원하는 보제가 전승되었다. 이처럼 금소에는 농업용수의 확보가 유리했던 까닭에 남대옹 옹에 따르면 “이 동네는 밥 안 굶는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다른 마을보다 물 사정이 좋았지. 우리 외할아버지가 여기가 다른 마을보다 제일 물 사정이 좋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 동네는 밥 안 굶는다고 그랬지.”

수자원 확보에 노력했던 주민들의 인식은 길안천을 ‘금소천’이라 불렀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길안천이 가진 지리적인 위치나 행정적인 위상에 따른 의미보다, 생업에 가장 적절하게 이용되는 금소 사람들의 냇물이란 의미에서 ‘금소천’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금수’라는 지명이나 ‘금소천’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이 인식한 냇물의 아름다움과 유용성을 함께 드러내는 것으로, 주민들이 이 냇물을 중요하게 여긴 결과라 할 수 있다.

[정보제공]

  • •  남대원(남, 1931년생, 금소리 거주)
  • •  임승대(남, 1946년생, 금소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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