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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예언하고 대비한 이인(異人) 겸암 선생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A010401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재해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은 효자이자 이인(異人)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겸암퇴계가 향리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퇴계 또한 그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함에 감복하여 총애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부용대 남쪽 기슭에 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할 때 ‘겸암정사(謙巖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퇴계였다.

겸암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겸암정사에 묻혀 학문에 심취해 있던 겸암은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랏일을 보게 되어 전함사별좌로 임명되었다.

그 후 의금부도사와 한성판관, 원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몇 차례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겸암이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아우 서애는 임금을 모시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겸암은 왜란이 터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팔순 노모를 업은 채 식솔들을 거느리고 왜적 떼와 도둑을 피해 밤낮으로 오솔길을 더듬어 고향 하회에 돌아와서 노모를 모셨는데, 당시 서애선조에게 형인 겸암을 관직으로부터 해직시켜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읍소하여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겸암은 뒤에 풍기군수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이 있을 때에도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57세 되는 해 가을 원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노모를 위하여 사직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겸암은 나라에 직접적인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아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임진왜란 중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아우 서애에게 미리 알려주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전한다. 서애가 평양에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맞이할 때의 이야기이다. 서애는 전투에 필요한 평양지도를 준비하여 이여송의 군대가 전투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했고, 이여송서애의 선견지명에 놀라 조선에 우수한 인재가 있다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서애가 소맷자락에서 꺼냈다는 평양지도를, 사실은 형인 겸암이 미리 서애에게 준비해서 주었다는 것이다. 즉 겸암은 지도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애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일본 측에서 서애를 죽일 요량으로 자객을 보냈는데, 겸암이 그것을 미리 알고 동생 서애에게 “오늘 중 한 명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할 것이니, 그 중을 내 집으로 보내게.”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중이 서애의 집을 찾아와 하룻밤 재워 줄 것을 청했고, 서애는 건너편 형님 집으로 그 중을 보냈다. 한밤중에 겸암은 집에서 잠든 중을 깨워 일본에서 보낸 자객임을 확인했고, 중으로 변장한 일본 자객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겸암의 선견지명에 놀라서 뒤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갔다고 한다.

이렇듯 서애는 임진왜란 중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이야기되지만, 겸암은 범상치 않은 이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비록 겸암이 동생 서애처럼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맏이로서 부모를 봉양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충분히 이인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정보제공]

  • •  류성하(남, 1923년생, 하회리 거주)
  • •  류시봉(남, 1933년생, 하회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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