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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송별신굿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2299
한자 佳松別神-
영어의미역 Village Tutelary Festival in the Gasong-ri
이칭/별칭 가송별신제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집필자 조정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마을신앙
의례시기/일시 3년마다 정월 초이튿날과 초사흗날
의례장소 산성
신당/신체 서낭대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서 공민왕의 딸과 관련되어 몇 년마다 한 번씩 성대하게 벌였던 공동체 신앙의 한 형태.

[개설]

가송별신굿은 일반적으로 정성을 들이는 동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성격을 갖는 마을굿으로, 가송별신제라고도 한다. 매년, 3년, 5년, 7년, 10년 간격으로 벌어지며 무당집단과 마을공동체가 함께 벌이는 축제적 대동굿이라 할 수 있다. 청량산낙동강 자락에 자리한 가송마을에서는 부정기적으로 청량산성 공민왕당공민왕 가계신의 마을을 돌며 퍼레이드를 벌이고 진법희를 벌이는 형태로 별신굿이 연행되었다.

[연원 및 변천]

안동 지역 전체의 별신굿 연원은 공민왕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의 구체적인 형상화로 탈놀이와 진법희로 표현되고 있다. 하회마을의 중당이 국신당(국사당)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은 공민왕을 신격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이며, 수동별신굿 같은 경우에는 확실히 공민왕과 관련된 별신굿 유래를 보여준다. 또한 병산별신굿 역시 도령당을 모시는데, 병산서원공민왕이 하사한 사전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살펴볼 때 공민왕을 신격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송마을에서는 공민왕의 딸을 신격으로 모심으로써 공민왕 가계에 대한 신앙이 성행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별신굿들은 지역민들에게 자긍심과 정체성의 기재로 작용해 왔고, 이 힘이 별신굿이 최근세까지 전승될 수 있게 만든 동인이 되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안동 지역에 별신굿이 성행한 까닭은 공민왕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적 축제의 전승과 함께, 지역적 정체성을 드높이기 위한 재지사족 양반 세력들의 의도와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자신들의 해방구를 열어내면서 언론권과 힘의 결집을 이루고자 했던 일반 민초들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상호교섭이 있었기에 별신굿은 더욱 발전하였고 점차 민중들의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절차]

약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송마을 사람들은 입칠봉을 넘어서 3년마다 한 번씩 정월 초이튿날과 초사흗날에 산성으로 세배를 갔다. 날씨가 사나워 아무리 눈이 많이 오더라도 빠뜨리거나 미루지 않았다.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의 서낭대를 모시고, 당주와 마을 사람들이 왕복 12㎞의 세배를 다녀왔다. 산성마을 사람들은 세배행렬을 맞이하여 따뜻이 대접하였다.

가송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부인당의 친정인 공민왕당에 가서 친정아버님한테 인사를 하고 돌아와서 당주를 정하였다. 당주를 정할 때에도 서낭대에 부인당의 신을 청해서 결정하였다. 무당격인 사람이 경을 외우면서 신을 청한 다음 누구를 당주로 하면 되겠느냐고 신에게 의사를 묻는다. 신대가 이동하여 멈추는 집이 그해 당주집이 되며, 집주인이 한 해 동안 당주를 맡아서 제를 주관한다. 신대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주인은 자리를 펴서 맞이하고 굿패는 축하하는 풍물을 친다. 그리고 간단한 술상이 마련되어 잔치가 벌어진다.

가송별신굿에서 중시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대이다. 이 신대에 신의 구체적인 형상물인 여성의 옷을 걸고 마을굿을 연행하며, 이 신대에 내린 신을 다시 당에 모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또한 이 신대의 신탁에 의지해서 굿을 진행해 나간다. 즉 신대가 당에 붙어야 확실히 신이 편안하게 좌정했다고 믿는 것이다.

[현황]

3년마다 세배를 다녀오며 벌이는 마을굿은 예전에는 여러 명의 무당을 불러 더욱 성대하게 제를 올렸으며, 이때에는 원근 각지에서 이웃 주민들이 구경을 오기도 했다. 특히 가송마을은 풍물이 유명해서 진법치기를 하는 때에는 신의 뜻에 따라 수십 회를 연행하기도 하는 등 별신굿의 신명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가송마을의 진법치기는 본래 12채에 맞추어 구성된 화려한 진법놀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가지의 진법만이 남아 있으며, 놀이적인 요소나 군사진법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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