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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995
한자 孝子
영어의미역 Dutiful S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정순임

[정의]

전통시대 효행으로 이름난 안동 출신의 인물.

[개설]

전통사회에서 효(孝)는 유교 윤리(인의예지) 중 가장 근본이 되는 항목으로 여겼으며, 가정에서의 효는 곧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의 기초로 여긴 가장 중요한 도덕이었다. 효자는 가계의 연속이 중요시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나라에서는 효행을 적극 권장하였고, 암행어사의 암행 활동에서도 효자를 천거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 지방 수령의 추천을 받아 표창하기도 하였다. 비석을 세워 기렸으며, 정부 문서에 기록하여 관직에 나아갈 길도 열어 주어 가문의 영광이 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암행어사가 출두할 경우 효행의 기록을 담은 민원 문서들이 쇄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동은 고려시대 이래로 수많은 선비들이 배출된 곳이며 지금까지도 전통적 가치관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고장이다. 그런 만큼 안동에는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효자로 정려된 이들이 많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효자들이 정려되었으며 안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동의 효자]

『영가지』에 소개된 안동의 효자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때 신체의 일부를 잘라 먹이는 등 병구완을 지극히 한 이들, 둘째,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 3년간 정성으로 시묘를 하여 정려를 받은 이들, 셋째, 앞의 두 가지를 병행한 이들이다. 병구완을 지극히 한 이들로는 묘을동과 이세걸, 시묘를 정성으로 한 이들로는 권백종·김문신·김자수·권여생·권질·김한백, 어버이 생전에나 사후에나 효를 다한 이들로는 김시좌·김정일 등이 있다.

묘을동은 향교의 노비로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끓여 먹였고, 이세걸도 어머니가 병이 들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먹여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권백종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벼슬이 동지중추사에 이르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시묘를 하였고, 일이 조정에 알려져 1345년 정려가 내려졌다. 김문신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별장을 지냈다. 3년 동안 아버지의 무덤을 지켰으며, 일이 조정에 알려져 1390년 정려가 내려졌다.

김자수는 고려시대 사람으로 어머니의 묘에서 시묘를 하여 정려되었다. 권여생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안동부의 아전으로 있었다. 어머니 무덤에서 3년간 시묘를 하였고, 일이 조정에 알려져 1373년 정려되었다. 권질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아 1402년에 정려되었고, 김한백도 어머니의 무덤에서 3년 동안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어 정려문을 하사 받았다.

김시좌는 고려 태사 김선평의 후예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어머니에게 효도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여러 해 동안 빗질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 등에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면서 죽만 먹고 지내며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시묘를 마치고도 아침저녁으로 사당을 살피기를 평생토록 한결같이 하였으며 무덤을 왕래하는 것을 하루도 그만둔 날이 없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풍산에 효자각이 있다. 김정일은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 네 개를 잘라 끓여 먹여 병을 낫게 하였고,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임하에 정려문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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