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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극락전을 품고 있는 봉정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963
영어의미역 Bongjeongsa Temple Embracing the Hall of Paradise Which is the Oldest Wood Building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봉정사길 222]지도보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이효걸

[개설]

봉정사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화엄강당을 지어 신림(神琳)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불법을 전한 이후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불교 문화재의 시대적 원형이 잘 보존된 귀중한 사찰로 고건축, 불교 회화, 사찰의 형태, 자생 풍수지리사상, 한국 화엄사상 등 여러 측면에서 독특한 불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찰이 수리하거나 증축하여 원형이 많이 바뀐 데 비하여 봉정사는 보존성이 뛰어나 전통 사찰의 풍모를 잘 유지하고 있다. 1999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전통문화를 보기 위해 하회마을봉정사 두 곳만을 방문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이 불에 타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봉정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로는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 봉정사 대웅전(鳳停寺大雄殿, 국보 제311호), 봉정사 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봉정사 고금당(鳳停寺古今堂, 보물 제449호), 무량해회(無量海會), 봉정사 만세루(鳳停寺萬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봉정사 우화루(鳳停寺羽化樓), 봉정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등이 있다.

[봉정사는 살아 있는 고건축 박물관이다]

봉정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목조건축물이 반경 20m 이내에 집약되어 있다. 더구나 목조건축물은 모두 각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어서, 봉정사는 한국 고건축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고건축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1. 극락전대웅전

주심포 양식의 극락전은 고려 말기에 중창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이고, 다포 양식의 대웅전은 지금까지 조선 전기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이나 후불 벽화의 고려 불화 기법으로 볼 때 극락전 중창과 비슷한 고려 말기까지 조성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고 추정된다.

2. 화엄강당과 무량해회

화엄강당은 큰 규모와 견고하고 아름다운 짜임새 면에서, 고금당은 규모는 작아도 견고하고 아름다워 화엄강당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요사채인 무량해회는 조선 후기 건물로, 법당의 중심 마당으로 향한 툇마루를 단아하게 하여 내방객을 맞이하는 방식이라든지, 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구릉 쪽에 마루를 내어 수직의 경직감을 여유 있게 처리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장중하고 품격 있는 주변의 건축물과 잘 어우러진다.

3. 봉정사가 품고 있는 두 개의 공간

봉정사 경내에 있는 각 건물 자체가 지니는 가치와 더불어 각 건물들이 배치되어 만들어 내는 공간의 구획과 분위기도 음미할 만하다. 현재의 봉정사는 두 개의 중심 공간이 나란히 늘어선 구도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과 무량해회로 둘러싸인 응신불 석가모니불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의 뒷면과 고금당 앞면으로 둘러싸인 보신불 아미타불의 공간이다.

대웅전 공간이 여러 사람이 모여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고 예배를 볼 수 있는 집회의 공간이라면, 극락전 공간은 여러 사람을 위한 설법의 공간이 아니라 조용히 염불을 할 수 있는 개인 차원의 수행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 크지 않는 봉정사 경내를 구태여 두 영역으로 구분한 것은 화엄종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화엄강당을 지을 당시의 불교사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유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산암

봉정사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봉정사 대웅전 동쪽에 있는 영산암도 빼 놓을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봉정사 영산암은 엄숙한 사찰 건물이라기보다 자연주의적 취향을 가진 유가(儒家)의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영산암은 몇 개의 독립된 건물이 마루로 연결된 정방형의 폐쇄적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외곽의 어디서나 넘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개방형 구조로 되어 있다.

영산암의 압권은 내부의 마당이다. 완만한 비탈의 구릉을 다듬지 않고 비탈진 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마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좁은 공간에 변화를 주고, 그 변화의 자연스러움을 여유로움으로 승화시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봉정사 대웅전은 한국 불교 회화의 보고다]

봉정사 대웅전의 불교 회화는 고건축물의 가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가치가 크다. 고려 불화의 흔적이 뚜렷한 후불 벽화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단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 단청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한국 불교 회화의 보고이다. 특히 고려 불화가 벽화로 보존되었다는 점, 고려 불화의 소재와 기법이 망라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불교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1. 고려 불화의 결정체, 대웅전 후불 벽화

대웅전 후불 벽화는 화기(畵記)에 「영산회상도」라고 되어 있으므로 일단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면 구성의 내용을 살펴보면,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로 화현되어 실제로는 『화엄경』을 설법하는 ‘화엄경적 영산회도’라 할 수 있다.

화엄경적 시각에서 보면, 응신불 석가불과 보신불 아미타불은 모두 법신불 비로자나불의 화현이라 볼 수 있으므로, 화엄종(華嚴宗)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봉정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이 이러한 초역사적이고 융합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대웅전 후불 벽화는 고려 불화의 미륵하생도, 아미타불 내영도, 지장보살도 등 다양한 장르를 종합한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고려 불화의 종합적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 화엄 사찰의 정통성을 드러낸 대웅전 단청

봉정사 대웅전의 불교 회화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대웅전 내부의 경우, 우물천장 범문자 단청, 고주의 용 그림 단청, 어칸 대들보 안팎에 있는 금단청 위의 용 그림 단청, 똑같은 소불좌상 52개의 포벽화, 굵은 묵선으로 둘러진 고형의 머리초 단청과 금단청, 천장 안쪽으로 들어간 닫집 한가운데 있는 쌍용 그림 단청 등이다.

대웅전 외부에는 네 면의 포벽·평방·창방에 걸쳐 연결된 스토리를 가진 그림 단청이 20여 개 그려져 있으며, 순각판의 주악비천상과 처마의 금단청은 색상이 거의 훼손되지 않는 채 남아 있다. 특히 외부 포벽화 등에 있는 스토리를 가진 그림 단청은 『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 편력행을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편력하는 「입법계품」을 법당의 벽에 그린 그림으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로,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벽체에 『화엄경』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화엄 사찰의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봉정사는 새 시대의 사상을 품은 새로운 사찰의 전형이다]

1. 의상과 화엄종

7세기 후반 삼국의 통일은 불교사상의 통일을 강력하게 희망하였고, 의상은 그 요청에 부응하여 화엄종을 개창하였다. 의상의 해동 화엄종은 삼국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동질의 문화와 사상을 구축하여 그것이 민중의 생활 속에 실천되도록 하는 통일 시대의 역사적 과업이기도 하였다.

포용성이 높은 화엄사상은 통합의 구심점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알맞았으나 난해하고 복잡한 사상 때문에 민중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의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가장 대중성이 높은 정토종의 사상과 실천 방법을 적극적으로 화엄종에 도입하였다. 민중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정토종의 염불신앙을 수용하여 실천을 이끌어 내고, 그 실천의 목표점에 화엄사상과 암묵적으로 만나도록 한 것이다.

부석사의 중심 전각이 무량수전인 것도, 단계적 실천을 상징하는 부석사의 계단 배치를 정토종 일색으로 한 것도 바로 정토종과 융합한 해동 화엄종의 특징적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해동 화엄종의 이러한 대중성과 포용성은 시대적 요청과 맞물려 경상북도 북부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히 의상의 해동 화엄종은 봉정사를 교두보로 하여 지역적 확대를 꾀했다.

2. 새 시대의 이념을 품은 봉정사

부석사와 봉정사는 삼국이 정립하던 시대의 사찰과는 눈에 띄게 다른 새로운 이념을 품은 새 시대의 새로운 사찰이다. 새로운 사찰은 이념에서뿐만 아니라, 사찰의 위치나 형태마저도 앞 시대의 사찰과 구분된다.

삼국시대의 사찰이 도회에 있는 거탑 중심의 평지 사찰이었다면, 삼국 통일 뒤에는 불교의 시대적 역할이 바뀌고 불교의 영향력이 지역적으로 확대됨으로써 산지에 있는 법당 중심의 구릉형 사찰로 변모한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찰이 산지 구릉형 사찰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 원형은 바로 부석사와 봉정사라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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