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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75
한자 李弘祚
영어음역 Yi Hongjo
이칭/별칭 여곽(汝廓),수은(睡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의병장|입향조
출신지 전라북도 익산시
성별
생년 1595년연표보기
몰년 1660년연표보기
본관 한산
대표관직 회인현감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한산(漢山). 자는 여곽(汝廓), 호는 수은(睡隱). 할아버지는 이대형(李大馨), 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해산(海山) 이문영(李文英), 어머니는 풍산류씨(豊山柳氏)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딸이다.

[활동사항]

1595년(선조 28) 10월 17일에 전라도 함열군(咸悅郡, 현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경성(京城) 낙선방(樂善坊,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인데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할머니 남궁씨(南宮氏)의 고향에서 잠시 살았던 때 태어난 것이다. 4세에 아버지를 잃고, 6세 때는 형 연천공(漣川公)에게 보내졌으며, 8세 되던 해에는 모친을 따라 외가인 안동 하회에 가서 외조부 서애 류성룡에게 글을 익혔다. 이후 13세부터는 막내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柳𥘼)에게 본격적으로 배우며 학문과 덕행을 익혀 나갔다.

이후 과거 공부로 한양에 올라왔으나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국권을 농단한 채 폐모론을 주장함으로써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삼강이 끊어져가는구나!”라고 탄식하고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다시 안동으로 내려와 빙계서원(氷溪書院, 현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소재)에서 자연과 서책을 벗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인조반정 이후 몇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한양에서 치르는 성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36년(인조 14) 43세 때 병자호란이 터져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안동 인사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서둘러 의병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는 도중 참판 전식(全湜)이 영남의병대장이 되어 문경고을에 머물고 있음을 듣고 문경으로 달려갔다. 함께 군사를 모의하고 의병을 격려하고서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을 서두를 즈음 적에게 항복하여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1638년(인조 16) 영남 의병대장이었던 전식의 천거로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과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회인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고을의 악습을 없애고 몸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1646년(인조 24) 당쟁으로 세상이 들끓자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집안의 곡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노자로 쌀 두어 말만을 전대 속에 담고 홀연히 안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후 번다한 세상사의 굴레를 벗어나 산수를 소요하며 물고기와 새들을 벗하며 여생을 유유자적하였다.

1656년(효종 7)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60년 향년 66세로 진보(珍寶)의 방전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홍조는 경상도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자리를 잡아 수은공파(睡隱公派, 일명 안동소호리파)의 시조가 되어 후손들이 안동에서 번창하게 되었다. 현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등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남긴 후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수은집(睡隱集)』이 전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선산(善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원리에 있는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정** [활동사항] 네번째줄의
류진(柳袗)을 유진(柳𥘼)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공의 휘자는 衣변이 아니고 示변입니다.
  • 답변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 중 한자명은 수정하였습니다. 한글명 표기는 저희 사이트내에서 '류진'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01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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