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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73
한자 李玄逸
영어음역 Yi Hyeonil
이칭/별칭 익승(翼昇),갈암(葛庵),문경공(文敬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성별
생년 1627년연표보기
몰년 1704년연표보기
본관 재령
대표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할아버지는 이함(李涵), 아버지는 이시명(李時明),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현일은 경상도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며, 퇴계학파의 적통인 외조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에게 수학하였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 3) 이휘일『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였다. 1666년(현종 7)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 사직서참봉, 장악원주부, 공조좌랑, 사헌부지평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사은하고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78년(숙종 4) 공조정랑,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하였으며 1689년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 조치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아서 분황(焚黃)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을 거쳐 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册禮)에 참석하였고 1692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어 경신무옥과 임술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갑술환국(甲戌換局) 때의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당시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8년 갈은리(葛隱里)로 이배되었으며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렸다. 1700년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이거하였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소재)에 집을 짓고 제생(諸生)을 강학하였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이현일은 퇴계학파의 적통이자 퇴계 학설의 가장 급진적인 옹호자였다.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퇴계의 제자들은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옳다고 여겨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고,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같은 이들은 오히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수긍하는 입장이었다. 이후 기호지방에서는 이이의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이의 주장을 공격하고 이황의 설을 옹호하기 시작한 인물이 이현일이었다.

이현일이이의 주장은 이(理)가 너무 허무한 것이 되어 만화(萬化)의 근본이 되지 못하니 잘못이라고 보았다. 또 사단(四端)은 공(公), 칠정(七情)은 사(私)인데, 공에는 불선(不善)이 없으므로 이발(理發)이요, 사에는 선(善)도 불선도 있으므로 기발(氣發)이라 하여 이발과 기발의 구별이 있음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현일이이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으로 인해 이이의 제자가 주축이 된 서인들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고,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과 인생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인들은 이현일의 학문을 철저히 폄하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실록에 등장하는 “이현일은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라거나 “선비의 이름을 칭탁하여 아름다운 벼슬을 차지하고 부름이 있으면 곧 행하였다.”라거나 “강연에서는 시론에 부회하여 그릇되고 어리석은 말이 많았다.”등의 평가들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갈암집(葛庵集)』이 있다. 문집 안에는 「돈전수어(惇典粹語)」, 「충절록(忠節錄)」, 「율곡사칠서변(栗谷四七書辨)」 등의 저술을 포함하고 있다. 또 중형 이휘일과 공동으로 지은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묘소]

묘소는 본래 금양 북록(北麓)에 있었으나 1705년(숙종 31) 영해 신사동(新寺洞)으로 이장했다가 1833년(순조 33) 영해 서인량리(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행정(杏亭)으로 재차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에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환수되었다가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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