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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72
한자 李賢輔
영어음역 Yi Hyeonbo
이칭/별칭 여경(餘慶),비중(棐仲),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소주도병(燒酒陶甁),효절공(孝節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467년연표보기
몰년 1555년연표보기
본관 영천
대표관직 밀양부사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여경(餘慶)·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소주도병(燒酒陶甁)·설빈옹(雪鬢翁). 할아버지는 이효손(李孝孫), 아버지는 이흠(李欽),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호군 권겸(權謙)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현보는 경상도 안동부 분천리(汾川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골상(骨相)이 비상하였다. 뜻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고 사양하기를 좋아하였다. 어려서는 사냥을 즐기고 학문에 전념하지 않고 유난히 고집스럽고 장난스러웠다. 이를 걱정한 아버지가 18세 되던 해 임지였던 진보(眞寶)로 데려갔으며 19세 때 향교에 들어간 뒤로 학문에 전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응하여 글을 지으니 말이 문뜩 뛰어나서 동무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처음 벼슬에 나아갔다. 당시 김세필(金世弼)이 전랑(銓郞)이 되어 이현보를 매우 칭찬하여 선발하였다. 1502년 연산군에게 “사관은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것인데 멀리 엎드려 있으므로 임금의 동정을 미처 듣고 알지 못하는 바가 많아 일에 불편이 많습니다. 청컨대 임금께 조금 가까이 있게 하셔서 기록함에 빠뜨림이 없게 하소서.”라고 간언한 일로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되어 뒤에 안동부 안기역(安奇驛)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제수되어 영천군수와 밀양부사를 비롯한 여러 지방관직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선치(善治)로 명성이 높이 드러났다. 1542년(중종 37) 봄에 병으로 사퇴할 적에는 서울 사부들의 수레와 말이 도문(都問)에서 제천정(濟川亭)까지 이어졌다한다. 이때부터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이 내렸으나 번번이 사면하였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매우 사랑하여 분천의 승경지에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스스로 농암(聾巖)이라 호를 삼았다. 1555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9세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농암집(聾巖集)』이 있다. 문집 속에 「효빈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 8수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 『어부사(漁父詞)』가 유명하다. 『어부사』는 분강의 자연을 즐기던 중 우연히 얻게 된 기존의 『어부사』에 말이 중복되고 지루한 흠이 있으며, 내용도 음란함을 발견하고 원문의 뜻을 살리면서 글을 첨삭하여 본래 12장이던 장가를 9장으로, 10장이던 단가를 5장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 윤선도(尹善道), 이형상(李衡祥), 이한진(李漢鎭)으로 이어지는 어부가의 계보가 형성되었다.

[묘소]

묘소는 본래 경상도 안동부 용두산(龍頭山) 도곡(道谷, 현 안동시 와룡면 도곡리) 선영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있었다가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동부 재산면(才山面, 현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정자동(亭子洞)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했다.

[상훈과 추모]

1556년(명종 11)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행장을 짓고, 1557년 시호 효절(孝節)이 내려졌다. 1566년 신도비가 세워지고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2년(숙종 28)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위판(位版)을 옮겨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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