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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309
한자 金榮祖
영어음역 Gim Yeongjo
이칭/별칭 효중(孝仲),망와(忘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577년연표보기
몰년 1648년연표보기
본관 풍산
대표관직 이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할아버지는 사의(司議) 김농(金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부인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딸이다. 김대현의 8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련오계지미라 크게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미동(현 풍산읍 오미리)이라 사명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관직에 진출한 이가 김영조이다.

[활동사항]

김영조(金榮祖, 1577~1648)는 6세 때 아버지를 따라 영주로 내려왔다. 1598년(선조 31) 영주의 인근 도심촌에 머물고 있던 류성룡(柳成龍)을 형 김봉조(金奉祖)와 함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 이산서원 강회에 참석하였는데, 당시 아버지가 두 번째로 이산서원의 동주를 맡고 있었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8년(선조 41) 가을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李滉)『경서석의(經書釋義)』 간행을 위한 정서 작업에 참여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성균관전적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치 상황을 보고 10여 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때 고향으로 내려와 수암(修巖) 류진(柳袗)·계암(溪巖) 김령(金坽) 등과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 김영조의 문집에 전한다. 1615년(광해군 7) 병산서원에서 류성룡의 아들인 류진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등과 함께 『서애집(西厓集)』을 교정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부수찬·사헌부장령·사헌부대사헌·성균관대사성·사간원대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아갔다. 1624년(인조 1) 사헌부지평으로 있으면서 사헌부대사헌 정엽(鄭曄) 및 사간원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했으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2)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 내용이 경망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주장하였고, “인성군 광해군인목대비를 폐모할 때 동조하였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해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라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인조 11) 세자 책봉을 주청하고자 주청사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받았다. 1642년(인조 20)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 때 인사에 부정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망와집(忘窩集)』 8권 4책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9년(현종 10) 사림들이 영천(현 영주시)에 있는 향현사(鄕賢祠)에 김영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향현사는 귀산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0.30 [학문과 사상] 삭제 장근 선생이 천민이라는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아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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