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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985
한자 花山神道碑
영어공식명칭 Stele of Gwon Ju
영어음역 Hwasan Sindob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산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8월 5일연표보기 - 화산신도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화산신도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성격 비|신도비
건립시기/일시 1711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권주(權柱, 1457~1505)
재질 석재
높이 145㎝
너비 75㎝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산41 지도보기
소유자 권종만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화산 권주의 신도비.

[개설]

권주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지경(支卿)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 성종연산군의 어머니 윤비를 폐위시키고 사사할 때 사약을 가지고 갔다 하여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교살되었다. 중종 때 우참찬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화산유고(花山遺稿)』가 있다.

[형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된 화산신도비는 전체 높이 145㎝, 너비 75㎝, 두께 27㎝로서, 장방형의 좌대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비문은 퇴계학파의 정맥을 계승하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남인의 영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김천도찰방을 지낸 이유(李濰)가 썼다. 비각은 1981년 10월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금석문]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예조참판겸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증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겸지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춘추관사 지의금부사 권공신도비 병서

승훈랑 전행김천도찰방 이유(李濰)가 쓰다.

공의 휘는 주(柱), 자는 지경(支卿)이니 안동인이다. 그 시조 휘 행(幸)은 고려 왕씨의 대광공신 아부태사(亞父太師)요 그 후 대를 이어 높은 벼슬에 올라 널리 알려졌다. 증조의 휘는 심(深)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판관으로서 좌통례에 증직되었다. 조의 휘는 항(恒)이니 성균사예를 지냈고, 죽어서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이(邇)니 함종 현령을 지냈고 죽어서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덕산송씨(德山宋氏)니 찰방 휘 원창(元昌)의 따님이다.

공은 매우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다른 사람보다 매우 탁월했다. 겨우 10세에 경전과 역사에 두루 통달하였고 13세에 지은 글은 문득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부터 문장과 글씨가 더욱 정교해졌다. 성종 갑오년(1474)에 18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무술년(1478)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서 유학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용석(用石) 김연숙(金鍊叔), 종호(從濩) 신차소(申次韶)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주문공의 옛일을 모방해서 향약을 지었다.

매월 초하루에 『소학』을 강할 때 선발된 사람들이 모두 당세의 유명한 선비였다. 또 연연(淵淵) 최부(崔溥)와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 일찍이 함께 「동반록서(同泮錄序)」를 지었는데 교제를 잘하고 신의를 돈독히 하며 마음과 길을 같이하는 그 이로움이 쇠를 끊을 수 있다는 뜻을 말했으므로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해 외우기에 이르렀다. 이해 신축년(1481)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가게 되어 홍치 경술년(1490)에 사헌부지평에 배명하였다가 이내 현령공(縣令公)의 상을 당했다. 복을 마친 뒤에 홍문관 부응교에 배명되었다.

그 때에 우리나라 변경에 와서 살던 대마도 사람들이 이곳 백성들과 조그마한 이해문제로 다투다가 불손한 언사를 내뱉었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주에게 알리고자 청하였다. 성상께서 “조정의 신하 가운데서 학식과 사려가 있고 대체를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라”고 하시자 이에 공이 선발되었다. 허백정(虛白亭) 홍공(洪公), 오졸재(迂拙齋) 박공(朴公), 지족당(知足堂) 조공(趙公)이 모두 떠나 보내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와의 명을 받들 때는 성종대왕의 말년이었다.

정사년(1497)에 도승지가 되었고 곧 품계가 가선에 올라 충청감사로 나갔다. 임술년(1502)에 동지중추부사로서 조천부사(朝天副使)로 차정되었다. 돌아와서는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에 배명되었다. 정사를 다스릴 때 대체가 지녔으니 칭송이 있었다. 연산 갑자년(1504)에 사화가 일어나자 이해 공은 평해(平海)로 귀양을 떠났다. 이듬해 6월 13일에 사형의 명이 이르자 공은 시를 지어 그 충정으로 나라에 몸을 바침과 뜻밖의 사화에 연루된 뜻을 말하였다. 스스로 상심할 뿐, 경겁하고 떠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으니 운명에 임해서도 이와 같이 조용하였다.

사형을 당할 때의 나이가 49세였으며, 모월 모일에 풍산현 정산의 서쪽 기슭의 남서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중종이 반정하자 억울한 누명을 벗고 의정부우참찬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이씨니 지중추정숙공 휘 칙(則)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낳았다. 맏은 질(礩)이니 봉사이다. 다음은 진(嗔)이니 홍문관 수찬과 이조정랑을 지냈고 성질이 강직해서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찍이 남곤(南袞)심정(沈貞)의 간신을 배척하다가 마침내 파직삭과를 당했다.

뒤에 또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인한 안정민(安貞愍:安瑭)의 화에서 죽었으니, 듣는 자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음은 석(碩)이며 다음은 굉(硡)이니 참봉이다. 딸은 현감 박영석(朴永錫)에게 출가하였다. 여러 집 자손이 혹은 끊어지고 혹은 계승되었으나 오직 참봉공의 후손이 자못 번창하여 그 현손 박(搏)이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가 되었고 그 아우 정(挺)의 아들 훤(愃)이 또 문과에 급제하여 정평부사가 되었다. 군수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징(憕), 회(恢), 협(協)이다. 징의 아들은 구(榘)며 곤손형제가 여러 명이다.

공은 타고난 모습이 아름답고 행의가 결백하여 이미 곧은 절개와 청렴한 명망으로서 당세에 추중을 받았다. 또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재명이 당세에 높았고 행의가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더니 불길한 시대를 만나서 예측치 못한 화를 당했으니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갚아주는 것이 과연 어찌 이러할까. 아! 비간이 심장의 해부를 당했음에도 공자는 그가 인하다고 일컬었고 굴원이 소상강에 몸을 던졌음에도 주자는 그가 충성스럽다고 일컬었다.

이제 공이 비록 불행히 화난을 입어 죽었으나 퇴도(退陶) 문순공(文純公)이 일찍이 묘소를 배알하고 시를 지어 그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의 아름다움을 천양하여 드러내었다. 태사공(太史公)이 이른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비록 현명했어도 공자가 있었기에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고 한 것이 어찌 믿어지지 않겠는가? 공의 6세손 구(榘)가 일찍이 나(玄逸)와 교유하였는데, 하루는 그 숙부의 명으로 그 부친이 지은 유사(遺事) 한통을 가지고 와서 묘소에 표기할 문자를 청하며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해 남긴 글과 왕복한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징빙할 곳이 없습니다. 본시 사적의 시종을 상고할 길이 없이는 서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억울함이 풀려 증직의 혜택을 입게 되었으므로 마땅히 비석에 사유를 새겨 후세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운이 불행하여 조부와 부친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셨으니 지금까지 묘소에 그 사유를 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지금 이룩하지 못한다면 유명에 죄를 지을까 두렵습니다. 집사께서 다행히도 애석히 여기셔서 명을 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여러 집안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모으고 또 마음에 느낀 바를 말하여 돌에 새기도록 하고 이어서 명(銘)을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선비는 항상 벼슬을 얻지 못하여 그 재능을 펴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고, 또 항상 몸을 닦지 못하여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긴다. 오직 선생께서는 출신하던 초년에 거의 뜻을 얻어서 이름이 드러나셨다. 아! 만년에는 절의로 인해 시대의 불길함을 만났구나. 인(仁)하면서도 재앙을 만났으니 정도를 행하고도 화난을 당하는 일은 예부터 많았으니 선생에 대해서도 또 어찌 한탄을 하오리까.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선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승훈랑 전행김천도찰방 이유(李濰)가 쓰다.(有明朝鮮國 嘉善大夫 禮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 三衛都摠府 副摠管 贈資憲大夫 議政府 右參贊兼 知經筵 弘文館大提學 芸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春秋館事 知義禁府使權公神道碑 幷序

承訓郎 前行金泉道察訪

李濰 書

公諱柱 字支卿 安東人 其上祖諱幸 爲高麗王氏大匡功臣亞父太師 其後世率相繼 有達官聞人 曾祖諱深 登文科官至江陵判官 贈左通禮 祖諱恒 成均司藝卒 贈吏曹參議 考諱邇 咸從縣令卒 贈吏曹參判 妣德山宋氏 察訪諱元昌之女 公幼聰明穎悟 強記絶人 纔十歲博通經史 十三作句語 輒驚人  自是詞章字畫 日益精妙 成化甲牛年十八 入太學補上舍生 戊戌丁內艱 旣卒喪 游泮宮與南秋江孝溫 金用石鍊叔 申從濩次韶諸公 倣朱文公故事 作鄉約 或月朝講小學 其選皆一時知名之士 又與崔公溥淵淵 相得甚歡 嘗著同泮錄序 以寓善交際敦信義 同心同道其利斷金之義 京師人 至相傳誦 是冬始釋褐 弘治庚戌 拜司憲府持平 未幾遭縣令公憂 服闋拜弘文館副應敎  時島夷之在彊域者 與邊氓爭小利 出不遜語 廟堂請遣使持節 徃諭島酋 上必擇廷臣之有識慮 知大軆者遣之 公於是實應其選 虛白亭洪公迂拙齋朴公 知足堂趙公皆 有送行語 旣竣事還 復命時 成宗大王之末年也 丁巳爲承政院都承旨 尋進階嘉善 出按湖西節壬戌以西樞 差充朝天副使還拜嶺南按廉使 爲政常持大軆 有風謠稱頌之美 燕山甲子 搢紳之禍又作 公於是責平海郡 明年六月十三日 後命至 公作詩以自傷 極道其忠貞許國 橫罹奇禍之意 終無怵惕驚遽狀 其臨命從容 乃如此 死時年四十九 以某月某日葬于豐山縣井山西麓坤向之原 及 中廟靖國 雪寃加褒 贈至議政府右參贊夫人李氏 知中樞謚貞肅公諱則之女 生四男 一女 長礩奉事 次曰嗔 弘文修撰 天官員外郎 性剛直不畏彊禦 嘗斥南袞 沈貞之姦 竟坐是 落職削科名 後又爲宋祀連所誣告 死安貞愍瑭之禍 聞者莫不哀之 次三碩 曰硡參奉  女適縣監朴永錫 諸房子孫 或絶或繼 惟參奉公之後 頗昌大 其玄孫搏 登文科官至郡守 其弟挺之子愃 亦擢文科 爲定平府使 郡守有三子 曰憕曰恢曰協澄有一子 曰榘 昆孫兄弟凡若干人 公天姿粹美 行義修潔 旣以直節淸名 爲 一 世所推重 又能文章善草隷 才高當世 行不愧古人 而遭時不祥蹈不測之禍 天之報施善人 果何如哉 嗚呼比干剖心 先聖稱其仁 屈原沈湘晦菴稱其忠 今公雖不幸蒙難以死 退陶文純公 嘗作詩題墓道 稱其文章節行之懿 以顯揚之 太史公所謂伯夷叔齊雖賢 得夫子而名益彰者 詎不信然公之昆孫 榘嘗從玄逸游 一日以其叔父之命 抱其先君子所撰次遺事記一通 來請所以表其墓者曰 自我先祖遭罹慘禍 遺文徃牒 堙沒無徴 固無所考驗其事終始 而鋪張稱述之 然自蒙雪寃加 贈之澤 法宜建石琢辭 以覺于後而家世不幸 大父父相繼淪謝 至今墓道 未克表 大懼此事遂已 獲戾幽明  唯執事幸哀而賜之銘 旣累辭不獲 於是掇拾諸家所輯錄 且道其所感於心者 書于石以記 系之以銘 銘曰

士常病不得位 無以展布其才能 又常病身不修名 沒世而無稱 惟先生發軔之初載 亦庶幾志得而名揚 吁嗟晚節之凶屯 諒遭時之不祥 仁而遇禍灾兮履正道而蒙難 自古莫不然兮 於先生而又何歎

資憲大夫 吏曹判書兼 成均館祭酒 世子侍講院贊善 李玄逸 撰

承訓郎前行金泉道察訪 李濰 書)”

[현황]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2011년 현재 권종만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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