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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797
한자 安東樊南古宅
영어의미역 Beonnam Historic House, Andong
이칭/별칭 번남택,삼호당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의촌길 76-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3년 8월 31일연표보기 - 안동 번남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1월 9일연표보기 - 안동 번남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6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안동 번남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재지정
성격 고가
건립시기/일시 조선 후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의촌길 76-5]지도보기
소유자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 문중(주손 이동익)
문화재 지정번호 국가민속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개설]

안동 번남고택순조 때 지어진 가옥으로 서울의 창덕궁(昌德宮)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번남(樊南)은 조선 후기 문신인 번엄(樊广)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의 아호이다. 이동순은 본관이 진성(眞城)이고, 자는 의경(義卿)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9세손이며, 참판(參判) 이귀천(李龜天)의 아들이다. 1807년(순조 7) 문과에 급제하여 1815년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병조좌랑·사간원정언에 이어 이듬해 사헌부지평겸선전관을 지냈다.

1841년에는 한성좌윤이 되었고, 1844년 병조참판, 1845년에는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58년(철종 9)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이듬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안동 번남고택을 중건한 이만윤(李晩胤, 1834~1906)은 본관이 진성이고, 자는 계조(繼祖), 호는 좌산(左山)이다. 이휘부(李彙溥, 1809~1869)의 아들로 태어나서 186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안동 번남고택삼호당(三乎堂)이라고도 불렸다.

[위치]

안동 번남고택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의촌길 76-5]에 있다. 안동시 예안면 소재지인 정산리에서 지방도 919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1.5㎞ 정도 가면 태곡교(台谷橋)가 나온다. 태곡교를 건너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접어들어 호반을 따라 형성된 외길로 10㎞ 정도 들어가면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이다. 의촌리도산서원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앞에는 안동호가 펼쳐져 있는데, 300m~400m 전방에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이 보인다. 마을 노인회관 앞에서 우측 길로 200m 정도 들어가면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바로 옆에 안동 번남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변천]

안동 번남고택순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이휘부가 선친 이동순을 위해 건립하였고, 1875년(철종 8) 이휘부의 아들 이만윤이 직접 감리하여 중건하였다. 이만윤이 쓴 편액에 ‘정사추구월상량(丁巳秋九月上樑)’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중건 연대가 1875년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안동 임청각(臨淸閣)처럼 99칸으로 창건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어 50여 칸 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 보수 중에 있다.

[형태]

안동 번남고택은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방에 ‘ㄴ’자형의 바깥행랑채를 두고, 이와 연접하여 ‘ㅡ’자형 안행랑채와 ‘ㄷ’자형의 안채로 이루어진 ‘ㅁ’자형의 본채를 두었으며, 그 좌측에 ‘ㄱ’자형의 사랑채를 두었다. 바깥행랑채는 전면에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1칸 크기의 광 3개를 나란히 두고 우측에는 문간방으로 통하는 반 칸의 마루를 두었으며, 문간방 옆에는 각 1칸, 2칸, 1칸 크기의 광과 1칸 크기의 외양간을 차례로 두어 정면이 모두 13칸이 된다. 이와 연접하여 우측 외곽에 1칸 크기의 부엌과 문간방과 협문칸을 두고 그 옆에 헛간 2.5칸을 두어 바깥행랑채의 외곽은 5.5칸이 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뒤에는 바깥행랑채에 비해 대지를 1m 정도 높여 사랑채와 본채를 배치하였다. 본채에 딸린 안행랑채는 길이가 7칸으로 맨 좌측에 중문간(中門間) 3칸을 두고 1칸 크기의 문간방과 광, 2칸 크기의 헛간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특히 안동 번남고택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중문간의 운용인데, 3칸 중문간 앞에 안채와 차단하는 2칸 크기의 내외벽을 설치하고 중문의 좌측에 사랑채로 통하는 협문을 설치하여 내외의 공간을 분리하였다.

안채는‘ㅗ’자형의 6칸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1칸 크기의 방과 고방을 두고 방과 직교하여 안방·헛간·마루·광을 배치하였다. 대청의 우측 모서리 부분에는 반 칸 크기의 건넌방을 두고, 대청을 1칸 건너서 2칸통의 상방과 1칸의 부엌을 두었으며, 부엌과 마주하여 반 칸의 고방을 꾸몄다. 대청 우측면과 상방 우측면에 퇴를 설치하였다.

‘ㄱ’형의 사랑채는 좌측면과 우측면이 5칸으로, 좌측에는 각 3칸의 대청과 온돌방과 반 칸의 부엌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부엌과 직교하여 1칸 부엌과 2칸통의 방을 두었다. 사랑채의 좌우 전면에는 반 칸의 퇴를 설치하였는데, 이 툇간은 안방 앞의 마루와 연결된다.

[현황]

안동 번남고택은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1월 9일 국가민속문화재 268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 문중(주손 이동익)이다. 현재 안동 번남고택에 걸려 있는 「삼호당기(三乎堂記)」는 이만윤이 자찬한 것이며, 글씨는 아들인 도운(陶雲) 이중태(李中泰)가 썼다. ‘삼호(三乎)’란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의 ‘남을 위해 일을 계획하되 불충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교제함에 신의를 잃은 바 없었는가. 전수받은 바를 익히지 않은 바 없는가[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안동 번남고택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집과는 달리 3대 이상의 대가족이 거주할 수 있도록 배치와 평면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선 후기의 가옥으로서 규모가 크고 구조가 특이해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0.20 [개설],[현황] 수정 <변경 전> 번암(樊庵) 이동순 /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9세손이며, / 1844년에는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변경 후> 번엄(樊广) 이동순 /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9세손이며, / 1844년 병조참판, 1845년에는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1월 9일 중요민속문화재 268호로 지정되었다.
이용자 의견
이** 감사합니다. 국가문화재지정은 2011년 11월로 지정되었으므로 수정합니다.
  • 답변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은 2011년 11월 9일로 이미 수정된 상태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10.25
안*** 李同淳의號는 樊庵이 아니고 樊广이며,온계 이해의 9세손이아니고,퇴계 이황의 9세손입니다.또한 1985년에 호조참판을 역임하였습니다.번남댁은 2009년 9월에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268호로 지정되어 현재 보수중에 있습니다.
  • 답변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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