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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762
한자 權太師神道碑
영어공식명칭 Stele of Gwon Taesa
영어음역 Gwontaesa Sindobi
이칭/별칭 권태사행신도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8월 5일연표보기 - 권태사신도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권태사신도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성격 비|신도비
건립시기/일시 1661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권행(權幸)|권성원(權聖源)|허목(許穆, 1595~1682)
재질 석재
높이 219㎝
너비 109㎝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11 지도보기
소유자 안동권씨 종중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도비.

[개설]

권태사신도비(權太師 神道碑)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권행은 후삼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가 싸운 고창(古昌, 현 안동)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승리함으로써 공신에 책봉되었다. 본성은 김씨이었으나, 권씨를 사성(賜姓)받았으며 대상(大相)이라는 관계(官階)를 받기도 하였다.

[건립경위]

1661년(현종 2) 권행의 24세손인 당시 군수 권성원(權聖源)이 세웠다.

[위치]

권태사신도비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11 능동재사(陵洞齋舍) 왼쪽에 있다.

[형태]

높이는 219㎝, 너비는 109㎝, 두께는 37㎝이다. 좌대(座臺)의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얹은 구조이다.

[금석문]

비문은 권행의 24세손인 권시(權諰)가 짓고, 이경휘(李慶徽)가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액(篆額)을 쓴 것으로, 원문은 권시의 문집인 『탄옹집(炭翁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행(幸)인데 본래는 김(金)씨이니 신라왕과 동성(同姓)이었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高麗)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 북쪽 병산(甁山)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때 공께서 김·장 양공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고을 사람들과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얻게 되어 의로운 소리를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여 “김행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성(姓)을 하사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봉하고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남향(南向)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이니 낭중(郎中)이고, 아들 책(冊)을 낳았다. 책(冊)은 본부의 향리가 되어 몇 세대동안 동안 호장이나 장교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들이 각 고을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들을 모두 통합하고 그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 장민자(長民者 백성의 웃어른)를 호장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이를 장교(將校)라 하였으며, 중앙의 관원을 보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리(外吏 외관직)의 효시였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번창해져 높은 벼슬아치가 나오고 세상의 흠모가 대대로 이어졌으니 부(府)에 사당을 지어 공을 향사할 때 김공과 장공도 함께 모시되 권씨 후손들이 제사(祭祀) 일을 주관했다. 묘(廟)에는 옥퉁소·옥관자·조복·금대·상아홀·밥그릇·시저·칠한 잔·받침대 등이 있으니 모두 우리 태사공이 사용하시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700여년을 대대로 전해온 손때가 아직도 완연하다.

성화(成化) 연간에 18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 찾다가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봉분을 가토(加土)하고 표송(標松)을 심었다. 유언에 따라 같은 언덕에 부장하였고 옹의 아들 유(裕)·작(綽) 등이 비를 세워 표지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에 22세손 판서 극지(剋智)가 경상감사로 와서 종인들과 모여 제사를 올리고 묘비가 망가진 것을 새 돌로 다시 세웠다.

가정(嘉靖) 임인년(1542)에 외손 김광철(金光轍)이 부사가 되어 사당터를 넓혀 새로 지었고, 21세손 영의정 철(轍)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제전(祭田)과 묘직(墓直)을 두었다. 병진년(1556)에 부사(府使) 소(紹)가 제전을 더 사고 곡식 100석을 공급하여 권씨 성을 가진 이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장케 하여 제수(祭需)에 보태도록 하며 또 묘역을 수축하여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게 했다. 계해년(1563) 부사 응정(應挺)이 묘정(廟庭)에 비를 세웠으며, 만력(萬曆) 계축년(1623)에 24세손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사당을 중수하고 춘·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최근의 계사년(1653)에 관찰사 우(堣)가 묘소 아래다 재사(齋舍)를 처음으로 건립하고 몇 집이서 수호케 했다. 기해년(1659)에 영천(榮川)군수 성원(聖源)이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한 뒤 개연히 말하기를, “자손이 비록 많지만 전에 평창공이 아니시면 뉘라서 태사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겠는가. 당연히 신도비를 세워야 할텐데 비명을 짓고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태사공으로서 비석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성취하자”고 하니 모두들 쾌히 동조했다. 무릇 후손이 원근(遠近)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이 모두 와서 돌을 다듬을 때에 부사 이연은 곧 나의 외손이라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성원 및 종인(宗人)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하라 위촉했다.

아! 우리 시조가 신라 말 고려 초를 당하여 대의가 드러나고 공열이 탁월함은 사람들이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빛나서 전후로 방백 수령이 성손이 아니면 외손들이라 모두 묘사(廟祀)와 묘소 일에 진력해서 창설하고 보수하며 여기에 사는 후손들이 전곡(錢穀)을 맡아서 제사를 끊임없이 받들며 이제 또 산소 앞에 비석을 세워서 천만년 뒤라도 모두가 태사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적덕(積德)의 갸륵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의 무덤은 제일 위가 태사공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이며, 세 번째는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하며, 그 아래에 서애(西厓) 정승 류성룡(柳成龍)의 부친 묘소가 있으니 또한 외손이 된다.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힘을 자랑하고 절의에 통달하고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건졌으니 경사로움이 후인에게 미쳤도다

고려 태조가 성을 하사하고 군을 승격하고 봉하여 내려주셨다네

공덕이 매우 높으시니 어찌 덕을 갚지 않으리까

날아갈듯한 사당이 있어서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나이다

손때가 묻은 유물로 금대와 옥피리가 있도다

누가 제사를 주장하는가 부중에 사는 후손들이라네

교체하여 관장을 삼가 대마다 전해 감을 게을리 말지어다

토지가 있고 곡물이 있으며, 재실이 있고 비석이 있으며

여러분들이 계승하여 창설하고 중수함에 결함이 없어

공덕 새긴 비석을 세우니 또한 더불어 영광되도다

영세토록 상고됨이 있을테니 내가 잡된 말을 한 것이 아니로세.”

24세손 한성부우윤 권시(權諰)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숭정(崇禎) 신축년(1661) 9월 세우다.

權太師幸神道碑

[頭篆]高麗太師權公幸神道碑銘

[碑文]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公諱幸本金氏與新羅同姓羅季與金宣平張貞弼守古昌郡甄萱入羅君弑國覆高麗太祖徃救之屯郡北甁山柵與萱相持公與金張二人謀曰吾輩義不與萱共戴天顧力不能報盍投王公共滅此賊遂以郡佐麗祖有甁山之捷義聲大振麗祖喜曰金幸炳幾達權可謂能權矣乃賜姓權拜大相陞郡爲安東府封食邑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坎坐之原子仁幸官卽中生子册册求爲本府吏數世爲戶長將校初豪傑割據郡縣麗祖旣統合使仍守其地長民者稱戶長統兵者稱將校遣王官監之此外吏之始也其後子孫益大以蕃珪組蟬聯奕世相望廟于府以祀公金公張公亦與焉權氏世主祀事廟有玉笙玉貫子朝衣服金帶象笏銀鉢匙箸漆杯盂皆我太師公所服用之物今七百餘年世傳之手澤猶宛然成化間十八世孫平昌郡事雍盡誠求之得誌石於墓傍爲加封樹有遺命祔葬同原雍之子裕綽等立碣以表之萬曆戊子二十二世判書克智觀察嶺南合宗人祭之墓碣之仆者買石新之嘉靖壬寅外裔金光轍爲府使卽其廟闢而新之二十一世領議政轍爲觀察使置祭田守戶辰府使紹增其田給穀

百碩俾首吏姓權者掌之以供粢盛又治乖域而歲一祭之癸亥府使應挺碑于廟萬曆癸丑二十四世吉川君盼觀察重修廟宇祭春秋以中丁今癸巳觀察使堣創齋舍墓下僦人戶守之己亥榮川郡守聖源禮祠展墓慨然曰子孫雖多向非平昌公塾知太師墓之在斯神道早有銘者何挈蕝之艱以吾太師公而尙闕顯刻玆非吾宗人之責乎盍圖之僉曰諾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卽斵石府李侯卽外裔幹其事聖源及宗人屬諰記其事噫我始祖當羅麗之際大義較著功烈卓然赫赫在人耳目名與天壤相敝而前後爲方伯太守非姓孫則外裔也皆盡力于廟祀若丘墓創之修之苗裔之在玆土者典錢穀奉俎豆不絶今又立石墓隧使千萬世後皆知爲太師公之墓亦可見積德之盛也原上之墓第太師第二平昌第三則或稱平昌夫人之葬云其下西厓柳相公成龍先墓在焉亦外裔也遂爲之銘曰

量力達節讎報耻雪仁拯斯民慶衍後人麗祖賜姓陞封錫號丕視功載靡德不報

有翼其廟祀事孔明手澤傳寶金帶玉笙誰其尸之府中後裔謹守迭掌罔墜厥緖有田有穀有齋有碣諸公相繼創修罔缺載樹顯刻亦與有光其永有考余言匪哤

二十四世孫 漢城府右尹 權諰 撰

外裔 吏曹參議 李慶徽 書

外裔 司憲府掌令 許穆 篆

崇禎 辛丑 九月 日 立)

[현황]

소유자인 안동권씨 종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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