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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82
한자 西路軍政署
영어음역 Seoro Gunjeongseo
영어의미역 Headquarters of The Western Route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단체|무장항일투쟁단체|자치기관
설립연도/일시 1919년 11월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22년 1월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여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설립목적]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자치 활동을 지도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919년 1월 부민단의 제도와 사업을 이어받아 한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한족회는 군정부를 따로 조직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서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0년 청산리 전투와 간도참변이 있고 난 후 독립군 기지는 물론이고 한인사회마저 큰 피해를 보게 되어 서로군정서는 점차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22년 1월 대한통군부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는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활동사항]

한족회의 주요부서와 간부진은 중앙총장 이탁(李鐸), 서무부장 김동삼(金東三), 법무부장 이진산(李震山), 학무부장 윤기섭(尹琦燮), 재무부장 안동원(安東源) 등이었다. 그 밖에 한족회에 참여한 안동 지역 출신으로는 권기일(權奇鎰)·김규식(金圭植)·김성로(金聲魯)·배명특(裵命特)·배영진(裵永進)·이상룡(李相龍)·이준형(李濬衡)·이형국(李衡國) 등이 있다. 지방자치조직으로는 매 1,000호마다 총관(總管), 100호마다 가장(家長), 10호마다 실장(室長)을 두었다. 그리고 이주한인사회를 보다 굳건히 결속시키기 위해 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를 발간하였다.

또한, 한족회는 각 민족학교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무기를 구입하는 등 일제와 무장항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군정부 건립에 착수하였다. 3·1운동 발발 후 국내에서 몰려오는 청소년과 이주한인사회의 자제들을 모아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정부의 중요기구인 독판부와 정무청 및 의회를 구성하였다. 한족회가 이같이 활발히 준비하는 가운데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으로 독립항전의 기능을 갖는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로군정서에 참여한 안동인으로는 독판 이상룡,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참모부장 김동삼, 서무부장 김성로, 학무부장 김형식(金衡植), 그 밖에 김규식·김동만(金東滿)·김만수(金萬秀)·김만식(金萬植)·김원식(金元植)·김장식(金章植)·김중한(金重漢)·김창로(金昌魯)·문창호(文昌鎬)·류림(柳林)·이광민(李光民)·이봉희(李鳳羲)·이승화(李承和)·이운형(李運衡)·이준형 등이 있다.

서로군정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서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군자금을 갹출하고, 특파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획득하였다. 또한, 1919년 5월 신흥강습소와 신흥중학교를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본격적인 군대 육성 체제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군자금과 독립군을 바탕으로 서로군정서는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친일 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국내로 들어와 일본 경찰의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로군정서는 재만 한인 동포들의 자치 업무를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정부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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