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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07
한자 驛院
영어음역 Yeogwon
영어의미역 Road Syste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명자(역사)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역로에 세워졌던 국영 교통, 통신 및 숙박시설.

[개설]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 및 외국 사신의 왕래 숙박, 말을 공급하여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한 기관으로 신라시대인 487년(소지왕 9)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성종 대에 더욱 구체화 되어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만들어졌다. 1390년(공양왕 2) 중앙의 외방 지역 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관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승제(驛丞制)를 조준(趙浚) 등 개국공신들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게 되면서 확립되었다. 나아가 역은 30리마다 하나씩 설치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주로 대로변의 주현(州縣) 각 읍에 역참을 설치했다. 각 역에는 말과 역장(驛長), 역정(驛丁)이 있었다.

1457년(세조 3)에 538개 역을 설치하고 이를 40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察訪)을 두었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하며, 찰방은 관내의 소속된 역을 통할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역승(驛丞)이 찰방으로 승격되고 40도 546개 역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는 모든 역에 찰방이 있어 찰방이 역장의 일도 겸하게 되어 있어 교통과 통신 업무를 같이 관할하였다. 찰방은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안동 관내에 찰방역으로는 안기역(安奇驛)이 있다. 1884년(고종 21) 서울에 우정총국이 창설되면서 역 제도는 없어졌다.

원(院)은 공무로 지방에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시설로, 역과 역 사이에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했던 국가 경영의 여관이다.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공민왕 때 이미 그 경비를 위해 원위전(院位田)을 마련했지만, 조선 초부터 확실하게 정비되었다.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각 도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승려를 원주(院主)로 하여 원 부근에 절이 있기도 했으며, 세종(世宗) 때 부근 주민 중에서 원주를 선발하여 관리하게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안동부 관할의 7역]

1. 안기역(安奇驛)

찰방역(察訪驛)으로 안동부(安東府)의 북쪽 3리에 있었으며 동으로는 금소역, 서로는 안교역, 남으로는 운산역, 북으로는 옹천역과 각기 30리 내외의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철파(鐵破: 의성)·금소(琴召: 안동)·송제(松蹄: 안동)·청운(靑雲: 청송)·문거(文居: 청송)·화목(和睦: 청송)·각산(角山: 진보)·영양(寧陽: 영해)·청로(靑路: 의성)·운산(雲山: 안동) 등 10개의 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찰방 18명, 역리 1,019명, 노(奴) 196명, 비(婢) 111명에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10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2. 옹천역(瓮泉驛)

안동부(安東府)의 북쪽 35리에 위치했으며 북으로 30리에 영천(榮川: 현 영주) 평은역(平恩驛)이, 50리에는 봉화(奉化) 도심역(道深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582명과 노(奴) 2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10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옹천역에 대한 김구용(金九容)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말 타고 나아가니 앞의 풍경은 나그네 마음을 괴롭히고/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시를 읊으며 우거진 수풀 사이 천천히 가노라니/홀연히 매화 한 그루가 눈부시게 서 있네(馬首風炯憣客情 溪山到處畵圖成 哦詩緩緩行芳草 忽有梅花一樹明)”

3. 금소역(琴召驛)

안동부(安東府)의 동쪽 30리(현 임하면 금소동), 임하현(臨河縣) 서쪽의 금소천(琴召川) 북안에 위치했으며 동남으로 40리에 송제역(松蹄驛)이, 동으로 60리에 청송(靑松) 청운역(靑雲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285명과 노(奴) 66명, 비(婢) 34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1필, 중마 1필, 복마 8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4. 송제역(松蹄驛)

안동부(安東府) 동쪽 76리, 길안현(吉安縣)에 위치했으며 동남으로 30리에 청송(靑松) 문거역(文居驛)이, 남으로 30리에 청송 화목역(和睦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42명, 노(奴) 14명, 비(婢) 5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없이 중마 2필과 복마 8필만 보유하고 있었다.

5. 안교역(安郊驛)

안동부(安東府) 서쪽 37리, 풍산(豊山)에 위치했으며 서북으로 30리에 예천(醴泉) 통명역(通明驛)이, 서남으로 40리에 용궁(龍宮) 지보역(知保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28명, 노(奴) 60명, 비(婢) 11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없이 중마 2필과 복마 8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6. 운산역(雲山驛)

안동부(安東府) 남쪽 33리, 일직현(一直縣)에 위치했으며 동남으로 30리에 의성(義城) 철파역(鐵坡驛)이, 남으로 50리에 비안(比安) 쌍계역(雙溪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7명, 노(奴) 79명, 비(婢) 26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9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운산역에 관한 김종직(金宗直)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운산역 둘레에 석양이 물드는데/시냇가의 그윽한 꽃은 말 주위에 향기를 피우네/ 들꿩은 사랑스런 마음으로 스스로 답하려 하니/수풀 건너로 멀리 애여장(艾如張)이 보이네(雲山驛畔欲彩陽 澗底幽花擁爲香 野稚挾春謀自應 隔林遙見艾如張)”

7. 유동역(幽洞驛)

안동부(安東府) 서쪽 130리, 감천현(甘泉縣)에 위치했으며서쪽으로 30리에 예천 통명역(通明驛)이, 북으로 30리에 풍기(豊基) 창락역(昌樂驛)이 각각 있었다. 역리 582명, 노(奴) 2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9필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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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동지방 역 현황

[안동부 관할의 20원]

1. 관음원(觀音院)

안동부(安東府)의 동쪽 5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2. 소을마원(所乙磨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동쪽 12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3. 관원(館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남쪽 10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없어졌다.

4. 독천원(禿川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남쪽 20리 독천(禿川) 가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5. 자제원(慈濟院)

안동부(安東府)의 서편 2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 영추원(迎秋院)

안동부(安東府)에서 서편 12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7. 도솔원(兜率院)

안동부(安東府)에서 서편 20리에 있었다. 도솔원의 동쪽에 높이가 몇 장(丈) 되는 돌부처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전에 불상에서 간장 같은 땀이 흘렀으며 배꼽 가운데 용솟음치는 샘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8. 연비원(燕飛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북쪽 12리에 있었다.

9. 낙목원(落木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북쪽 21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10. 비사원(飛沙院)

안동부(安東府)에서 북쪽 3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11. 두모원(豆毛院)

안동부(安東府)의 북쪽 두모현(豆毛縣) 아래에 있었다.

12. 오리원(吾里院)

안동부(安東府)의 북쪽 14리에 있었다.

13. 망지원(望至院)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 동쪽 10리에 있었으며 일명 망진(亡津)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14. 신읍곡원(申邑谷院)

임하현 동쪽 20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15. 양재원(楊才院)

감천현(甘泉縣) 남쪽 1리에 있었다.

16. 귀모원(歸毛院)

감천현 서편 8리에 있었다.

17. 보제원(普濟院)

임하현 동쪽 20리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해졌다.

18. 가라연원(加羅淵院)

소천부곡(小川部曲)의 남쪽 2리에 있었다.

19. 감마원(甘亇院)

풍산현의 서쪽 17리에 있었다.

20. 모현원(茅峴院)

임하현 서쪽 모현(茅峴)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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