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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진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05
한자 安東鎭管
영어음역 Andong Jingwan
영어의미역 Andong Garrison-comman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자(역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457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457년연표보기
폐지연도/일시 1882년연표보기
시행처 안동대도호부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의 군사 조직.

[개설]

조선 전기 안동이 속한 경상도의 군사 조직 체계는 관찰사가 지휘권을 장악한 가운데 진관 체제를 근간으로 육군과 수군이 대체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각기 좌·우로 구분되어 조직화되었다. 육군은 좌병사 예하에 경주·안동·대구진관을, 우병사 예하에 상주·진주·김해진관을 각각 설치해 이들 진관으로 군소의 진들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진관 체계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육군의 경우 전기에 비해 진관의 수가 증가하는 등 다소의 변동이 있었다. 좌병사 관할의 동래진관(東萊鎭管)·가산진관(架山鎭管)과 우병사 관할의 선산진관(善山鎭管) 및 성주진관(星州鎭管)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진관뿐만 아니라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소관의 제진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래는 원래 경주진관에 소속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현감에서 도호부사로서 거진(巨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같은 경주진관에 소속된 양산·기장을 예하에 두게 되었다. 또한 칠곡도호부의 신설과 더불어 확립된 가산진관은 대구진관 소속의 군위·의흥·하양·신령을 예하에 두었다.

좌도에는 순흥(안동진관)이 도호부로 승격되어 동첨절제사 소관의 진이 되고, 1676년(숙종 2) 신설된 영양(안동진관)과 고려 현종 이래 경주의 속현으로 있다가 1637년(인조 15) 비로소 복현된 자인(대구진관)과 함께 대구에 감영이 설치됨에 따라 대구판관이 절제도위 소관으로 신설되었다.

나아가 대구진관의 인동이 도호부로 승격하여 절제도위에서 동첨절제사로 바뀌는 대신 경주판관과 안동판관은 없어지게 되었다. 우도의 경우 선산·성주진관이 신설됨과 동시에 진주진관 소속의 거창·하동과 김해진관 예하의 거제가 절제도위에서 첨절제사 소관의 진으로 승격되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 후기 경상도 진관 편성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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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도 진관 편성

[제정경위 및 목적]

북방의 익군(翼軍) 체제와 남방의 영진군(營鎭軍) 체제로 이원화된 형태로 운영되던 조선의 지방 군사 조직은 1455년 군익도(軍翼道) 체제로 통일되었다. 이는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다시 중·좌·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인근의 여러 고을을 여기에 소속시켜서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체제는 남·북방의 군사 조직상 차이를 극복하고 획일적인 지방 군사 조직 체계를 확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라 1457년(세조 3) 행정 단위인 읍(邑)을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파악하여 행정 조직을 활용한 전국적인 방위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진들을 여기에 속하도록 하여 하나의 진관으로 편성해 독립적인 군사 거점으로 삼기 위한 진관(鎭管) 체제로 지방 군사 조직을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진을 대소(大小)에 따라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구분하고 거진을 중심으로 주위의 병렬적인 제진을 묶어 진관을 편성해 각 진관이 독립적으로 자체 방어 체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용]

안동에는 문음관(文陰官) 정3품으로 영장을 겸하는 대도호부사 외에 무관(武官) 정3품의 영장(營將: 前營將)이 별도로 있어 속오군의 실제 훈련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전영장 휘하에는 군관(軍官) 200명과 군뢰(軍牢) 30명이 있었다. 이러한 영장제도는 19세기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진관 체제가 속오군 체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동진관에 소속된 속오군은 그 형태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마군(馬軍)·보군(步軍)·마보군(馬步軍)·별대(別隊)·수졸(隨卒)·보충대(補充隊) 및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 되어 있는 보(保)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변천]

안동부에는 고려시대 이래 정3품인 대도호부사와 함께 민정을 주로 담당하는 정오품의 판관이 각 1명씩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대도호부는 원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어 군사상의 진호(鎭護)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순한 행정구획상의 명칭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군사적 중요성은 여전한데다 수령이 지방의 군사 업무를 겸하여 관장하는 관행에 따라 대도호부사는 병마첨절제사를, 판관은 병마절제도위를 겸하게 되었다.

판관은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 안동부의 쇠잔에 따라 한때 혁파된 적이 있으나 4년 만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뒤 1638(인조 16)에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병란으로 군민(軍民)이 곤궁하다는 점을 들어 판관을 혁파할 것을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으나,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은데다 잦은 설치·혁파의 반복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반대함으로 그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안동판관은 1671년(현종 12) 결국 혁파되었다.

안동대도호부는 대도호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군사적으로 좌도병마절도사의 예하에서 동첨절제사를 겸하는 영해·청송도호부사 및 예천·영주·풍기군수와, 절제도위를 겸하는 안동판관과, 의성현령을 비롯한 봉화·진보·군위·비안·예안·영덕·용궁현감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 안동진관의 이러한 편성은 세조대 진관 체제의 확립 당시에 마련된 것은 아니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소령(所領) 체제를 골격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안동진관 체제는 조선 후기에 일정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며 정비되었다. 그 변화를 문헌 자료를 통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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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진관의 변화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을 비교해 보면 도호부는 2개로 그대로였으나 청송군이 도호부로 승격함에 따라 순흥부가 청송부로 대체되었고, 군은 4개에서 3개로 줄어듦과 동시에 영천·청송에 대신하여 기천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풍기(豊基)가 속하게 되었으며, 현은 11개 가운데 하양·기천·인동·의흥·신령이 제외되는 대신 군위·용궁을 포함하여 8개로 조정되었다.

안동의 진관 체제는 『영가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전반까지는 변함없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여지도서』가 편찬될 당시 순흥부가 다시 포함되어 도호부가 3개로 늘어나고, 현은 군위현 대신 1676년(숙종 2) 신설된 영양현(英陽縣)으로 바뀌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순흥은 1413년(태종 13) 부에서 도호부로 승격했으나, 1457년(세조 3) 부사 이보흠(李甫欽)금성대군(錦城大君) 옹립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현으로 격하됨과 동시에 풍기에 예속되었다. 명종 때 사인(士人) 김중문(金仲文)이 중심이 되어 처음 복설청원(復設請願) 상소를 한 이래, 지속적인 복설운동으로 1683년(숙종 9) 도호부로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순흥부가 현으로 다시 격하됨에 따라 도호부가 2개로 줄어드는 대신 현이 9개로 늘어나는 변화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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