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396
한자 同姓-
영어의미역 Same Family Name Village
이칭/별칭 동족마을,종족마을,동족부락,동성촌,집성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형성된 성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개설]

1930년대의 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마을 총수는 28,336개로 이 가운데 14,672개가 동성마을이었다. 우리의 전통마을 가운데 반 이상이 동성마을인 셈이다. 동성마을은 동족부락(同族部落)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1930년대부터 주로 일본인 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일반화된 용어이다. 그러나 동족이란 조선시대에 친족·처족·외손을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이고, 부락은 일본에서 천민의 집단 거주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므로 동성동본으로 구성된 마을은 동성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형성과 발달]

오늘날 동성마을의 대부분은 읍내나 시내 등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邑治)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지역에 동성마을이 형성된 것은 지방의 양반층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양반들은 새로운 경제적 기반의 확보를 위해서, 그리고 향리(鄕吏)와의 차별화를 위해 읍치 지역을 벗어나 외곽의 촌락 지역으로 이주하여 갔다.

지금 동성마을로 존재하는 곳도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잡다한 성씨로 이루어져 있었고, 17세기 이후에야 점차 동성동본의 동성마을로 변모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아들 중심의 종법(宗法)이 보급되면서 결혼 제도가 장가가기에서 시집가기로, 상속 제도가 자녀 균분에서 적장자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처가를 따라 갈 일도 없었고, 부모의 재산이 아들 중심으로 상속됨으로써 한 마을에 비로소 부계 혈통의 친족 집단이 형성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종손(宗孫)은 점차 지주가 되어 갔고, 더 많은 지손(支孫)들은 몰락하여 종가(宗家)·종손으로부터 토지를 얻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양반이라는 신분만으로는 더 이상 특권 계층으로 존재할 수 없었고, 이 같은 사정은 동성마을의 발달을 더욱 촉진하였다.

[안동의 동성마을]

안동에는 양반이 많았던 특성상 그 어느 지역보다도 동성마을이 많다. 대표적인 동성마을로는 하회리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무실마을박곡리 전주류씨 집성촌인 박실마을, 가곡리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 주하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주촌마을과 온혜리 진성이씨 집성촌인 온계마을, 오미리 풍산김씨 집성촌, 망호리 한산이씨 집성촌인 소호마을 등이 있다.

1. 하회마을

하회마을풍산류씨 집안의 발상지로 지금도 그들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이 이곳에서 태어나는 등 풍산류씨는 600년여 년간 안동 하회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주민의 70%가 풍산류씨이다.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 도령이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으며, 강 건너 광덕리 건짓골에는 허 정승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1642년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외에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가 함께 기재되어 있으며,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2. 내앞마을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은 영남 사대길지(四大吉地) 중 한 곳으로 마을 앞으로 반변천이 둥글게 둘러싸며 흐르고 있다. ‘내앞’이란 지명도 천전(川前), 즉 반변천 앞의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의성김씨 동성마을로 형성되어 50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16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웃에 문화재로 지정된 종택들이 즐비하다. 특히 내앞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직접·간접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앞에 최근 건립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풍수상 내앞마을은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즉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 놓은 형국으로 부귀를 다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고관이 나온다고 땅으로 그 혈처에 의성김씨 종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의 풍수』에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소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성김씨의 중시조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다섯 아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 가일마을

안동시 풍산읍에서 하회마을 방면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이 있다.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공신인 권행(權幸)의 후손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500여 년간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 1403~1461)이 이곳의 부호인 유서의 사위가 되어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아 정착함으로써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4. 오미리

오미리풍산김씨들이 500년 동안 세거해 온 동성마을이다. 학가산의 한 갈래가 수십 리를 남으로 뻗어내려 죽자봉(竹子峰)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아미산(峨嵋山)이 굽어 돌아 마을을 감싸며, 서쪽으로는 멀찍이 도인산(道仁山)이, 남쪽으로는 곱게 솟은 검무산(劍舞山)을 바라보는 아늑한 동네다.

풍산김씨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銀說)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좌리공신 풍산백에 봉해진 김문유를 시조로 한다. 김문유의 증손 김동성이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석릉촌에 옮겨 살면서 오릉동(五陵洞, 지금의 오미리)에 별장을 두었다.

후손들은 대대로 고려에 벼슬하면서 송도(松都, 일명 개경·개성)에 옮겨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하고 송도의 사족(士族)들을 정책적으로 한양에 이주시킬 때 직장(直長)을 지낸 김자순(金子純)이 한양 장의동(壯義洞, 지금의 삼청동)으로 옮겨 살았다. 김자순의 형 김자량(金子良)이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김자순은 화를 피하여 안동으로 내려와 오릉동에 숨어 살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손자 김휘손(金徽孫)은 진산군수를 지냈고, 증손 김양진(金楊震)은 참판을 지냈다.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金義貞)인종이 세자 시절 서연관(書筵官)을 지내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인종이 즉위하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 인종이 왕위에 올라 곧 승하하자 병을 칭하고 낙향하여 오릉동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잠암(潛庵)이라 하고 아들 이름을 김농(金農)이라 지어, 시골에 숨을 뜻을 굳혔다.

김의정의 손자 김대현(金大賢)은 현감을 지냈고, 김대현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는 오형제가 문과 급제를 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오릉동을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경상감사로 하여금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를 세우게 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