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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장기로 차지한 대지산 명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1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미영

오미리의 지명유래는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오미마을표지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즉 원래는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으나, 허백당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릉동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일컫기도 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무(畝)’ 자를 넣어 오무(五畝)로 했던 것이다. 그 후 김의정의 손자 유연당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가 문과급제를 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하여 ‘오미(五美)’라는 마을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오미’라는 이름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풍산김씨오미리에 터를 잡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휘손(金徽孫)으로, 그는 두 살 때 아버지 김종석(金從石)을 여의고 어머니 춘천박씨 슬하에서 자랐다. 평소 후덕한 인품으로 주위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아왔는데, 벼슬 역시 효행이 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효렴(孝廉)에 선발되어 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한양에 살고 있던 김휘손은 조부 김자순(金子純)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고향 오미리를 방문하였다.

묘소가 위치한 뒷산 너머는 예천군에 속했는데, 그곳 산음리에 미래를 예측하는 재주를 갖고 있는 대부호 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박씨가 오미리에 잠시 머물고 있던 김휘손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장기를 두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만약 제가 장기에서 지게 되면 10리쯤 되는 대지산(大枝山) 한 자락을 드리고, 그대가 패한다면 한양에서 타고 오신 흰 나귀를 주십시오.”라고 제안을 했다.

김휘손은 박씨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듣고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판이 끝날 무렵 예천 부자 박씨는 일부러 장기를 져주고는, 가슴에 품고 있던 한 폭의 산도(山圖)를 김휘손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 표시된 땅이 바로 그대의 것이오. 제가 살고 있는 이 산은 여러 가닥으로 이루어진 용호(龍虎)가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남향으로 갈수록 명혈(名穴)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대를 이어서 지켜 왔으나 저희 조상들의 산소를 쓰지 않은 까닭은 이 터로 인해 큰 복을 누릴 만한 대인(大人)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겪었지만 일찍이 그대와 같은 훌륭한 품성을 가진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터의 주인은 공이 될 듯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풍산김씨는 대지산에 조상들의 묘소를 쓰기 시작했고, 박씨의 말대로 명혈에 묏자리를 잡아서인지 팔련오계(八蓮五桂)를 비롯한 문과급제자를 대거 배출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사람들은 대지산 여러 자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오미리의 뒷산을 ‘장판재[將板峴], 곧 ‘장기판이 벌어졌던 고개’라고 부른단다.

[정보제공]

  • •  김창현(남, 1937년생, 오미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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