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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59
한자 李蒧
영어음역 Yi Jeom
이칭/별칭 사성(師聖),천유자(天遊子),태백(太白)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생년 1579년연표보기
몰년 1627년연표보기
본관 영천
대표관직 한림학사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성(師聖), 호는 천유자(天遊子). 할아버지는 이충량(李忠樑), 아버지는 이덕홍(李德弘),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남응건(南應乾)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점은 1579년 8월 8일에 출생하였으며 자태와 성품이 아름다웠으며 머리가 총명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공부할 때 정구가 천재라 칭찬하며 계몽(啓蒙)의 도서를 전사하도록 하였다. 또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을 좇아서 배우면서 견문과 지식을 더욱 넓혔다.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1616년 순릉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로 발탁되고 이듬해 검열로 옮겼다. 1618년 예문관대교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승진되었다. 당시는 마침 폐모론이 한창 제기된 시기였는데 이점은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아 유곡(幽谷)으로 좌천되었다. 고송(孤松) 박공(朴公)이 ‘옛날 귀양 온 신선과 같다’는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셋째 형에 연루되어 경원으로 귀양가게 되자 “비록 나는 폐모의 논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폐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지도 않았으니 북방에 귀양 가는 것도 관대한 처분이다.”라고 하였다. 1627년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 불러들여 작전을 세우고 중요한 실무에 종사케 하였다. 오랑캐가 물러간 뒤인 같은 해 11월 14일 취중에 “내 마음은 하늘에 빛나는 해와 같고, 내 생애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처럼 깨끗하다.”라는 시를 읊고 난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천유유고(天遊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고을의 동쪽 천상(川上)의 묘향(卯向)에 있다.

[상훈과 추모]

권상익(權相翊)이 묘갈명을 짓고 김휘준(金輝濬)이 행장을 지었다. 1649년(인조 27) 벼슬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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