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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46
한자 李秀亨
영어음역 Yi Suhyeong
이칭/별칭 영보(英甫),도촌(桃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435년연표보기
몰년 1528년연표보기
본관 우계
대표관직 평시서령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 우계(羽溪).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고조부는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개국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지낸 이의(李薿), 증조부는 호분위(虎賁衛)를 역임한 이만(李蔓), 할아버지는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지낸 이인숙(李仁淑), 아버지는 군자감주부를 지낸 이경창(李景昌),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예문관제학을 지낸 안구(安玖)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수형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20세에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 5품직을 받았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平市署令)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들인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려(趙旅)와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장인의 고향인 순흥 도지리(道知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이수형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를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21세에 은거하여 94세로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집이 있는 한양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자신이 지은 가옥의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지리의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엇창살만을 만들어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고, 북쪽 벽은 종이로 앞에 놓인 마루를 가리게 하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아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게 했는데 이는 모두 장릉(莊陵, 단종릉)이 있는 영월 방향을 항상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도촌실기(桃村實記)』가 있는데 후손인 이경석(李慶氵奭, 1743~1799)이 이수형의 행적을 살펴보는 데 자료가 되는 글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흑석리 동북 간방(艮方)의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후에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6세손인 창설공(蒼雪公) 권두경(權斗經)이수형의 도지리 집을 들렀다가 이수형의 충절에 감읍하고는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려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하고 마루는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경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拱北軒)이라고 명명하였다.

[참고문헌]
  • 송지향, 『안동향토지』(대성문화사, 1983)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http://www.ugy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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