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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234
한자 權正忱
영어음역 Gwon Jeongchim
이칭/별칭 자강(子剛),자성(子誠),평암(平庵),충헌공(忠憲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봉화군
성별
생년 1710년(숙종 36)연표보기
몰년 1767년(영조 43)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관직 세자시강원설서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초자는 자강(子剛),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庵). 시호는 충헌(忠憲). 충정공(忠正公) 권벌(權橃)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권신(權藎),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로 생원 류이관(柳以觀)의 딸이다.

[활동사항]

권정침은 젊어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48세인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얼마 후 소시(召試)에 나아가 영조로부터 신임을 얻어 세자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다. 이후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고 소명(召命)과 사직을 여덟 차례 거듭하였다.

재임 중 장헌세자(莊憲世子, 사도세자)를 위하여 서연(書筵)에서 『주역(周易)』과 「주자기유봉사(朱子己酉封事)」 등을 강의하였으며 장헌세자 또한 권정침을 매우 신임하였다.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으로 장헌세자가 결국 죽음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세자를 보호하려고 거세게 저항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정형(正刑)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다. 이후 권정침은 향리에 은거하며 그날 죽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문을 닫아걸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권정침은 성리학의 의리(義理)를 깊이 궁구하였는데 특히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좋아하여 송독함에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일찍이 “도가 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니 다른 데서 구해서는 안된다(道在我心不可他求者也).”라고 말하며 더욱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평암집(平庵集)』은 1878년(고종 15) 현손인 권영하(權泳夏)에 의해 부록을 포함하여 8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문집 중 『연설기사(筵說記事)』와 『서연강의(書筵講義)』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쓴 것이다. 또 『소학통독설(小學通讀說)』, 『중용총설(中庸總說)』, 『물격지지설(物格知至說)』,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 『근사록강의(近思錄講義)』 등에 보이는 성리설은 스승 이광정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성리학적 이론을 지지하거나 혹은 그것과 합치되는 것들이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수정산(水晶山)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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