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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놋다리밟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007
한자 安東-
영어음역 Andongnotdaribalgi
영어의미역 Walking on a Human Bridge of Andong
이칭/별칭 지애밟기,기와밟기,논따리밟기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한양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12월 29일연표보기 - 안동놋다리밟기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안동놋다리밟기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재지정
성격 민속놀이|여성대동놀이
노는 시기 정월 대보름
관련단체 안동놋다리밟기보존회
예능보유자 김경희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행하는 여성의 집단 놀이.

[개설]

놋다리밟기는 ‘지애밟기’, ‘기와밟기’, ‘논따리밟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놋다리 밟기라는 대표 명칭 속에는 다양한 놀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꼬개싸움은 아주 격렬한 편싸움이었다. 놋다리를 놋쇠처럼 굳은 다리 또는 동교(銅橋) 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안동에서는 정월 한 달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달이란 뜻으로 노달기라 하였으며, 이 말에서 노는 달의 밟기 놀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연원]

놋다리밟기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공민왕 몽진 시 일행이 예천, 풍산을 거쳐 소야천(所夜川)에 이르자 마을의 여성들이 나와 허리를 굽혀 노국공주가 등을 밟고 건너가게 하였다. 그 뒤로 놋다리밟기를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놀이도구 및 장소]

놋다리밟기는 특별한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놀이 형식과 연행 장소에 따라 성밖 웅굴놋다리와 성안 줄놋다리로 구분되며, 각 마을 단위로 벌이기도 하였다.

[놀이방법]

1. 성밖 웅굴놋다리

안동 성밖의 놋다리는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행해진 놀이였다. 음력 정월 15일 저녁에 동부의 여성들은 현재 옥정동에 소재했던 ‘초당집’ 마당에 모여 들었고, 서부는 현재 법상동에 소재하는 ‘잿집’ 마당에 모였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이른바 공주를 선발한다. 공주는 가문이 좋고 총명한 7~8세의 여아를 대상으로 했는데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휘양을 썼으며 털토시를 꼈다. 공주가 복장을 갖추면 놀이를 시작한다.

처음에 ‘둥둥데미’를 한다. 일행이 각기 손을 잡고 원형을 이루어 앉으면 「둥둥데미 노래」를 합창하면서 처음에 선 여성부터 서로 잡고 있는 손을 타넘으며 원형으로 돈다. 이때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둥둥데미 노래」는 짤막하지만 한 마당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다음은 「둥둥데미 노래」이다. “어화유리 둥둥데미/ 둥둥데미 어화유리/ 저달봤나 난도봤다/ 저빌봤나 난도봤다/ 저길봤나 난도봤다.”

둥둥데미가 끝나면 만들어진 원은 똬리 모양으로 겹겹이 감겨 있다. 보통 100여 명이 참가했던 만큼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실감기 노래」에 맞추어 똬리를 푸는데, 가장 가운데에 있는 선두가 그대로 손을 잡은 채 길을 찾아서 풀어 나온다. 이때도 역시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둥둥데미는 공민왕이 포로가 된 형태이고, 실감기는 공민왕이 포로에서 풀려 나오는 형태라고 한다. 「실감기 노래」는 똬리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반복해서 합창하는데 「둥둥데미 노래」보다 템포가 빠르기 때문에 뛰어서 돌게 된다. 다음은 「실감기 노래」이다. “집실로 감아라/ 당대실로 풀어라.”

똬리를 완전히 풀어 돌아 나오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큰 원이 된다. 이어서 일행은 모두가 원 안쪽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치마를 어깨 위까지 뒤집어써서 저고리가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 구부리는 사람들은 주로 남의집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다. 나머지 처녀·새댁들·중년층·노인층 등은 원형을 둘러싸고 놋다리 노래를 부른다.

한쪽에서 “어느윤에 놋다리로”하고 문창하면 다른 쪽에서 “청계산에 놋다릴세”하며 답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허리를 구부린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구부린 여성의 등 위에서 공주가 떨어지지 않게 좌우에서 부축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이렇게 둥글게 구성하여 즐기는 놋다리가 웅굴(우물)놋다리이다.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공주가 웅굴놋다리를 한두 바퀴 돌고 나면, 놋다리의 선두는 원형에서 벗어나 대로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줄놋다리가 되는 것이다. 초당집에서 출발한 동부는 대로를 경유하여 ‘서문둑 다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잿집에서 출발한 서부 역시 줄놋다리를 지어서 대로를 경유하여 서문둑 다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이 행렬의 선두에 노래 잘하는 선창자 두 사람이 서고, 구부리는 여성들은 역시 어깨가 맞닿게 옆으로 서서 허리를 구부린다. 후창자들은 처녀·새댁들·중년층·노인층 등의 순서로 공주 뒤쪽에서 시작하여 대열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기도 하고, 대열의 뒤에 서서 따라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때도 역시 공주와 부축하는 여자, 그리고 구부린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동서부의 놋다리는 마침내 서문둑 다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때에는 서로 비켜 가기도 하고 사이좋게 합세하여 공주를 하나만 세워 놋다리를 계속하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동서부의 놀이패가 마주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꼬깨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특히 성안의 놀이패와 마주치면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를 해야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하여 집안 어른들이 권장하여 처녀들과 새댁들이 모두 다 참가했다. 놋다리밟기는 1910년 이후 중단되었는데, 그 후에는 가정에서 소규모로 하는 애기놋다리가 성행하여 192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2. 성안 줄놋다리

1) 삼웃들패

‘삼웃들’은 현재의 안동 시내의 조흥은행 부근이며 읍성(邑城) 내에 속한다. 정월 보름날 저녁을 먹은 후에 노래를 잘하는 노인층들이 먼저 나와 골목골목에서 놋다리 노래를 부르면 여성들이 삼웃들로 모여든다. 삼웃들은 성내에서 가장 넓은 장소로 이곳에서 놋다리를 구성하여 길이 넓고 걷기 편한 곳에서 놋다리밟기를 하였다.

놀이는 이른바 줄놋다리뿐이었다. 올라가서 밟는 소녀는 따로 공주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7~8세 정도로 삼회장 까치저고리에 털토시를 끼고 휘양을 썼다. 새댁들이 허리를 구부려서 놋다리를 구성했는데, 앞사람의 허리에 매인 명주 수건(온 폭 명주에 노란색 물을 들인 것)을 잡고 머리를 앞사람의 옆구리에 대었다. 이 노란색 수건은 구부리는 사람들이 다 매고 있는 것이다. 대열 좌우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50세 내지 60세 정도의 여성들이 3명 또는 5명씩 대열과 직각으로 늘어서서 놋다리 노래를 불렀다.

소녀가 구부린 여성의 등 위를 밟아 지나가면 뒷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서 놋다리가 계속 이어지게 하였으며, 대열 좌우의 창자(唱者)들이 노래를 주고받았다. 대개 우측에서 선창하면 좌측에서 후창을 하나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다른 놋다리패와 마주치면 싸움이 벌어지는데, 싸우지 않고 피해 가는 때도 있었다. 대체로 밤 11시경까지 즐기다가 해산했으며, 1910년경 중단된 듯하다.

2) 관아앞패

대보름 날 일몰 후 성내의 여성들이 관아 앞 광장으로 놋다리밟기를 하러 모여든다. 앞놀이는 없고 일렬로 행렬을 구성하면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안고 고개를 좌로 돌린다. 선두에 ‘창립’한 50대 이상의 노인들이 서고 그 뒤에 처녀, 새댁들이 허리를 구부려서 놋다리를 지었다. 창립은 아전풍속인데 나이가 50여 세쯤 되고 친손·외손을 볼 나이가 되면 비녀를 꽂은 머리를 풀어서 앞으로 돌려 여자상투를 만드는 것이다.

놀이는, 소녀가 허리를 구부린 사람들의 등 위로 두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등을 밟힌 사람은 다시 앞으로 가서 구부려 점차 앞으로 진행해 간다. 창립한 50대 노인들이 대열의 선두에서 선창을 하면 40대 정도의 여성들은 대열 좌우에서 따라가면서 후창을 한다.

행진로의 길이는 기껏해야 100m 정도였다. 동쪽으로는 피문루(북을 쳐서 관청의 집무시간을 알리는 루) 앞까지 갔었고, 서쪽으로는 ‘기다리목’이나 삼웃들까지 행진했다. 원래 남자들은 접근은 물론 구경조차 못했는데, 나중에는 문란해져서 대열 뒤에 따라가는 여성들이 남자들을 쫓기도 했다. 행진해 나가다가 다른 패와 마주치면 서로 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움도 하였다.

3) 임하면 금소리 놋다리밟기의 꼬깨싸움

금소의 놋다리밟기는 각기 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놀이들로 이루어진다. 각 놀이들은 개별적으로 다른 시·공간에서 행해질 수 있다. 이들 놀이 가운데 보름 명절의 특정한 밤이라는 시간적 한정성과 ‘텃논’과 ‘구무(구멍)다리’라는 공간적 한정성을 지닌 채 행해지는 놀이는 ‘꼬깨싸움’과 연이어 벌어지는 ‘구무다리뺏기’이다. 대단히 격렬하게 행해지는 이들 놀이만 동채싸움이 행해진 다음날 밤에 행해지고 나머지 지애밟기·콩심기·제달배기 등의 놀이는 명절기간 중의 어느 때나 마당이 넓은 집에서 행해진다.

금소의 꼬깨싸움은, 대보름날 밤에 각 마을의 여성들이 따로 모여 둘씩 짝을 이뤄 어깨를 걸고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어-허-ㄹ-루-야, 놋다-래-야-”를 합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동선은 봇도랑 옆으로 난 길에서 마을 앞의 도로로 이어지는 타원형의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동부 여성들은 서부쪽으로, 서부 여성들은 동부쪽으로 돈다. 이 과정에서 양편이 서로 만나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며, 더러는 서로 길을 뺏으려고 밀어붙여서 격렬한 몸싸움이 전개되기도 했다.

꼬깨싸움을 하는 당일이 되면 나이든 여성들은 놀이꾼들을 모으러 다닌다. 밤이 이슥해지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네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텃논으로 모여든다. 이때 특별한 이유 없이 놀이에 참가하지 않으면 여성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꼬깨싸움의 놀이꾼 편성은 동채싸움과 흡사하다. 덩치가 크고 억센 여자들이 머리꾼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 특히 강한 여성이 재빠르고 총명한 14~15세의 여자아이를 어깨 위에 태우는 꼬깨꾼이 된다. 꼬깨의 좌우와 후방에는 꼬깨를 보호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인원이 겹겹이 배치되어 “바람들어갈 틈도 없는” 사람의 장막을 형성한다.

꼬깨싸움의 방식도 금소동채싸움과 흡사하다. 먼저 앞머리의 여성들이 강력하게 대치하여 밀백이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한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면 물밀듯이 밀어붙이는데 이 과정에서 앞머리가 뚫리면 승부가 이내 결정된다. 승부는 꼬깨 위에 탄 아이들이 서로 싸워서 먼저 떨어뜨리는 쪽이 이긴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꼬깨 위에 탄 아이들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된다. 이를 감시하고 또한 변장하고 들어온 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몇 명의 감시자를 특별히 배치한다.

꼬깨싸움에서 일차로 승부가 결정되면 양편은 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구무다리’로 돌진한다. 구무다리는 봇도랑에 걸쳐진 작은 돌다리이다. 구무다리뺏기는 꼬깨싸움에서의 승리를 확인 받는 과정이다. 비록 꼬깨싸움에서 이겼어도 이 싸움에서 패하면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 구무다리뺏기의 승부는 구무다리를 먼저 많이 건너간 쪽의 승리로 결정된다. 따라서 양편의 여성들은 좁은 구무다리를 먼저 넘어가기 위해 격렬한 몸싸움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봇도랑에 빠지고 다치는 경우도 많았다. 더러는 서까래만한 나무를 가져와 도랑에 걸쳐놓고 넘어가려고도 했는데 상대편에서 나무를 덜렁 들어버려 도랑에 빠지기도 하였다. 승부가 결정되면 싸움에서 이긴 편은 환호하며 보름 명절 동안 줄곧 놀아온 “너른 마당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서 승리의 기쁨을 나눈다. 이때 또 다시 콩심기·제달배기·지애밟기 등의 놀이가 행해지기도 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보름은 달이 가장 차 오른 때이므로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따라서 풍농기원 제의는 대부분 보름에 행해진다. 정월 보름에는 풍농기원의 마을굿이나 동제를 올리고 팔월 보름인 추석에는 추수감사제를 올린다. 이러한 제의와 더불어 놀이되는 둥둥데미·월월이청청·강강술래·놋다리밟기 등의 원무는 모두 보름달의 형상과 함께 풍요를 상징하는 유감주술의 하나이다. 특히 이 놀이를 여성이 담당하는 것은 여성의 생리주기가 음력, 즉 달의 생생력 주기와 일치할 뿐 아니라 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성이 여성인 까닭이다.

그리고 똬리는 보름달의 소멸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 동시에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형상을 아울러 상징하는 것으로 계절적으로 겨울을 나타낸다. 반면 똬리를 푸는 것은 소멸과 생성의 과정을 상징하는 한편 계절적으로는 죽음의 계절을 보내고 생산의 계절인 여름을 맞이하는 것을 상징한다. 달의 소멸과 생성, 또는 겨울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일종의 유감주술이다.

[현황]

놋다리밟기는 안동민속축제 초기부터 제26회 대회까지 안동여자고등학교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현 경안여자정보고등학교) 학생들이 번갈아 시연을 하였다. 제27회 대회부터 놋다리밟기보존회 회원들이 시연하고 있다. 이밖에도 안동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 때 초청되어 놋다리밟기 공연을 하고 있다.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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