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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거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77
한자 創氏改名拒否
영어의미역 Resistance to Create One´s Family Nam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40년 7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0년 8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관련인물/단체 이현구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하자 거부한 운동.

[역사적 배경]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식민 정책은 전쟁 수행을 위한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내세우며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한국인을 철저히 일본인처럼 만들려고 하였다. 창씨개명은 이러한 정책 가운데 하나이었으며, 창씨개명거부는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거부하면서 일어났다.

[발단]

1939년 11월 제령(制令) 제19호로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성명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식의 씨명 제도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 법령은 1940년 2월 11일 시행되어 8월 10일까지 성씨를 결정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경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명을 중요하게 여기던 많은 사람들이 창씨개명에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안동 예안 출신인 이현구(李賢求)는 창씨개명에 저항하여 자결한 유일한 인물이다. 이현구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일찍이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고, 나라를 잃자 자결을 기도했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나라 없는 백성이라 자처하면서 산촌을 전전하였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단식에 들어갔고, 단식한 지 36일 되던 1940년 8월 6일에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창씨개명은 철저한 차별을 내포한 기만적인 조치이었으며, 한국 민족 전래의 가족제도를 무시하고 일본의 천황제적 가족제도를 강요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간악한 방법으로 철저히 탄압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거부는 일제의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여 죽음으로 맞서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의가 있는 사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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