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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39
한자 獨立運動
영어음역 Dongnip Undong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윤정

[정의]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안동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

[개설]

안동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안동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의병 항쟁, 애국계몽운동, 항일 투쟁, 3·1운동, 대중운동, 사회주의운동, 학생운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척사유림의 의병 항쟁과 자정 순국]

약육강식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19세기 중엽,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다양한 사상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상이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으로 주자학적인 질서를 정(正: 바른 것)으로 인식하고, 서양과 서학을 사(邪: 그릇된 것)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곧 바른 것인 주자학적 질서를 지키고, 그릇된 것인 서학을 배척해야 한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개항기 안동 유림의 위정척사운동은 주로 영남 만인소와 같은 상소운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경복궁을 직접 압박해 왔던 1894년을 기점으로 위정척사운동은 의병 항쟁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안동의 유림들은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척왜(斥倭)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에 따라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1894년 조선 말기 최초의 의병인 갑오의병에서 시작한 안동의 전기 의병은 1896년 9월까지 이어졌다.

화이관(華夷觀)과 의리론에 입각하여 의병 항쟁을 주도하던 안동의 유림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만도·이중언·김도화가 중심이 되어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을사5적을 참하고, 만국공법(萬國公法)에 호소해 일본의 침략성을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이상룡·박인화·배선한·류시연 등에 의해 1909년까지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척사유림들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몇 갈래의 길을 선택했다. 그 가운데 척사 의식이 강했던 안동의 유림들은 임금의 신하 된 자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에 입각하여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만도·이중언·류도발 등이 있다.

[혁신유림의 등장과 애국계몽운동]

위정척사에서 출발한 척사유림의 항거에 이어 1904년 이후 의병 항쟁을 주도했던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모색한 혁신유림(革新儒林)이 등장하였다. 류인식·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은 안동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대한협회 안동지회(지회장 이상룡)를 만들었으며, 다른 혁신유림은 새로운 현실 인식의 토대 위에 민력(民力) 양성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류인식·김후병·하중환 등에 의해 설립된 협동학교는 안동 지역 계몽운동의 요람이요, 안동 유림의 사상적 대변환의 갈림길이었다. 사상적으로 보수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였던 안동 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바람을 경상북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간 출발점이 되었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산실이었다.

[혁신유림의 만주 망명과 국외 항일투쟁]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혁신유림들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 가고자 하였다. 이들은 문중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집단적인 망명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문중이 김대락이 이끄는 천전리(내앞마을)의 의성김씨 문중, 이상룡이 이끄는 법흥동고성이씨 문중이다. 그들이 최적지로 선택한 서간도 유하현 지역은 신민회(新民會)가 독립운동 기지로 지목한 곳이기도 했다.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은 유하현·통화현·화전현·관전현·반석현 등에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해 나갔다.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의 자치 기관을 설립해 한인 사회를 이끌었고, 신흥무관학교·백서농장과 같은 교육 기관과 병영을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안동 사람들이 핵심을 이룬 서로군정서는 압록강을 넘어 일제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유격전을 펼쳤다. 이상룡은 이때 최고 직책인 독판(督辦)을 맡았다.

만주에 정착한 이후 안동 사람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와 간도참변을 겪은 뒤, 1922년 이후 독립군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통군부와 대한통의부를 성립시켰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김동삼은 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4년 11월에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와 독립군 세력을 총체적으로 관할하는 정의부를 성립시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김동삼은 정의부의 최고 책임자이었다.

1930~1940년대에 만주의 한인들은 길림과 하얼빈으로 북상하면서 한국독립당군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항일 투쟁을 펼쳤다. 특히 안동 사람들은 서간도·남만주·길림·하얼빈 일대에서 펼쳐진 항일 투쟁에서 핵심을 이루었고, 역할도 두드러졌다.

[1910년대 군자금 지원 활동과 3·1운동]

나라가 멸망하고 안동의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자 안동에서는 만주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에 들어갈 자금을 마련하고자 1915년 의병 계열과 계몽운동이 통합하여 조직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회 활동과 더불어 191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3·1운동이다.

안동 지역 3·1운동은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15일 동안 11개 지역에서 14회에 걸쳐 일어났으며, 10,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안동면·예안면·도산면·임동면·임북면·임서면·길안면·풍산면의 장터가 주된 3·1운동 장소였다. 안동 지역 3·1운동의 계기는 동경 유학생의 소식 전달과 고종의 장례에 참가했던 유림과 학생들에 의해 마련되었다. 특히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서울 시위 현장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나 태극기가 안동 시위 현장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안동의 3·1운동은 전통적 세력인 유림과 새로운 세력인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고, 농민 대중이 주력 부대로 참여하였다. 근대식 교육 기관의 학생들도 주요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즉 안동의 3·1운동은 척사와 혁신, 신분을 넘어 하나 되는 거군적(巨郡的) 운동이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유림들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유림단 의거)이 전개되기도 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수용과 대중운동의 전개]

1910년 안동 지역 각지에 설립된 사립 교육 기관은 1920년대 대중운동·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안동의 대표적인 운동 단체로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풍산소작인회를 들 수 있다. 안동의 본격적인 사회운동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통한 노동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노동공제회가 결성되자 9월 23일 안동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안동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가 안동의 노동운동을 주도했다면, 1923년 11월에 결성된 풍산소작인회는 안동의 농민운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풍산소작인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준태를 비롯한 김재봉·안상길 등으로, 지역의 농민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1925년에 들어와 안동의 운동은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관계한 김재봉·이준태·권오설·김남수 등에 의해 안동의 민족운동은 한층 역동적인 모습을 띠었다. 특히 1925년 1월 8일 이준태·김남수 등에 의해 조직된 화성회(火星會)는 안동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혁신과 사상적 전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안동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를 통한 민족협동전선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 단일적인 민족혁명전선의 결성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안동에서도 신간회 안동지회가 결성되어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김남수는 서울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을 이끌면서 각 지역에 야체이카 조직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한편 1920년대 전반기의 사회운동의 역량 축적으로 1927년 8월에 조선공산당 ‘도기관’이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에 관여한 안동의 인물로는 안상길이 있다. 경북도기관은 제4차 조선공산당 결성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 시기에 비해 조직이 다소 확대 변경되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야체이카가 조직되었고, 안동에도 조직되었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안동의 사회운동은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거듭되는 검거 사태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8년 2월경부터 시작된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김남수가 체포되었으며, 8월경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안상길(安相吉)·이회원(李會源)·권태동(權泰東)·이지호(李墀鎬) 등의 지도자들이 검거되었다. 게다가 안상길에 의해 조직된 경북 야체이카 안동 조직이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으로 무너지면서 안동의 사회운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학생운동]

1930년에 들어서면서 안동의 독립운동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쳤지만 이를 딛고 1931년 안동콤그룹(안동코뮤니스트그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안동콤그룹이 계획했던 대규모 봉기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직의 구성원과 활동 목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조직의 구성원은 기존의 지식인 위주에서 벗어나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을 포괄하였다. 또한 활동 목표도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노동자·농민의 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지만,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투쟁까지도 담아내고 있었다.

안동콤그룹이 와해된 이후 안동의 독립운동은 1943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 단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침체를 겪기도 하였다.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은 1943년 결성된 명성회와 1944년 결성된 조선회복연구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51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된 안동 독립운동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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