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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24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음역 Donghak Nongmin Undong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Movement
이칭/별칭 동학혁명,갑오동학농민혁명,1894년 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정의]

1894년 안동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세기 말 조선은 안으로는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은 약육강식이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아무런 힘과 준비가 없던 조선을 강제로 세계 자본주의라는 무대로 끌어들여 온갖 이권을 침탈하기에 바빴다. 더욱이 열강의 힘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부국강병책은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였고, 이에 대한 부담은 오직 농민에게만 강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 후반기에는 농민항쟁이 빈발하였고, 동학이 창도되었다.

농민운동의 진원지인 호남 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와 개항장은 대일 미곡 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 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 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 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 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학 입도자의 상당수는 동학이 가지는 종교적인 의미와는 관계없이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아니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을 동학의 조직력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에서 동학의 조직과 일반 농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893년 보은 취회에서는 마침내 농민 대중의 요구이자 민족적 명분이기도 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가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경과]

1894년 전라도 대부분의 지역을 석권하였던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이웃하고 있던 충청도와 경상도 서북 지역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더욱이 2차 봉기에 북접교단이 공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동학과 농민군은 보다 굳건하게 결합하게 되었다. 안동 지역 동학교도와 농민들 또한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에 고무되면서, 보다 직접적으로는 예천·상주 등지의 경상도 서북 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일정한 관련을 가지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2차 봉기 직전인 8월 21일에 경상도 서북 각지의 접주 13명이 모여 척왜를 기치로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하였을 때 안동의 동학접주도 참여하고 있었다.

안동의 동학농민군들은 외촌 지역에서 소규모 집단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가, 8월 22일, 23일경 대규모로 모여 안동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농민군은 안동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안동과 의성 경계 지역인 일직면에 집결하여 안동부를 공략하기 위한 선발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발대가 체포되고 또 안동 진영의 관군이 파견되자 농민군은 흩어지고 말았다. 안동과 인근의 동학농민군은 그 수나 조직력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이후 예천의 금곡(金谷) 화지접(花枝接)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예천읍내의 봉쇄와 공격에 참여하였다가 패배한 후 해산하고 말았다.

[결과]

경상좌도, 특히 안동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자. 그 이유의 하나로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1871년 ‘이필제 난’, 또는 ‘영해작변’의 문제이다. 이필제 난은 이필제 등의 주도로 영해에서 동학교단이 최초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이었다. 여기에는 영해만이 아닌 인근의 동학 조직이 총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동 지역 교도들 대부분도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필제 난은 실패하였고, 3백여 명에 이르는 교도와 농민들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필제 난의 실패는 초기 경상좌도 지역의 동학 조직을 복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이 지역의 교세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였는데, 수많은 사람이 살육당한 참혹한 경험이 갑오년에 이르러서도 동학교도와 농민들로 하여금 쉽게 떨쳐 일어설 수 없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이유로는 안동 지역이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남인 세력인데다, 학문적으로는 퇴계를 연원으로 굳게 결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학문적 결속은 강고하였다. 노론 정권이 영남 남인 세력을 견제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안동에 김상헌(金尙憲)을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였을 때 안동 사림이 보여준 대응의 강도는 이들의 강고한 결속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안동의 양반은 대부분의 지역과는 달리 지역 사회를 강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안동 양반이 농민층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동 양반층이 자기 분열 없이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동의 경제적 조건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의 토지는 산곡간에 소규모로 형성되어 있는 척박한 사질토이며, 농사 형태는 밭농사 위주이다. 이것은 대지주로의 성장을 자연스럽게 억제하면서 골골마다 그만그만한 중소 지주와 동성 촌락을 양산함으로써 양반 상호간 또는 동성 간의 결집을 더욱 강고하게 하였다.

이렇듯 안동 양반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정치적·학문적·경제적으로 강한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한 여기에 문집을 발간하고 서원과 사우를 건립함으로써 양반으로서의 권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다산 정약용은 “사대부가 수백 년 동안 관직에서 막혀 있어도 존부를 잃지 않고, 골골마다 종족이 모여 한 조상을 받들고 양반으로서의 위세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안동의 양반은 비록 중앙 정계에서는 소외되었지만, 학문적·경제적·정치적인 동질성을 확보함과 아울러 동성 간의 강한 혈연적인 결집을 이룸으로써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강고한 향촌 지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써 농민층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성리학을 철저히 견지하는 학문적 성향은 동학과 농민이 추구하던 세계관과는 철저히 대립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적인 사고와 개혁으로부터도 차단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양반이 동학과 농민군 지도자로서 등장하고 있던 사정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결국 안동에서는 농민층이 양반 지배층의 억압 구조를 뚫고 솟아오를 만한 조직과 내재적인 성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척박한 안동 지역 경제 상황으로 인해 봉건 지배층의 수탈과 일본 상인의 횡포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는 것과, 양반층의 향촌 지배가 일정하게 기능함으로써 한편에서는 수령과 향리의 가렴주구를 견제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단적인 행위를 일정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봉건 모순을 완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권과 양반층 모두의 지나친 농민 수탈에 대한 규제는 퇴계 향약 이후의 전통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부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이 넓은 평야지대의 미작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다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봉건 수탈은 농업 생산성이 높은 곳에 집중되게 마련이었고, 미곡 수출을 주도하던 일본 상인과 지주층의 이해는 이곳에서 보다 용이하게 관철될 수 있기 마련이었다. 봉건 모순과 외세 침략의 상대적 완화는 농민층의 반봉건, 반외세 활동을 보다 절실하게 만들지 못했다.

[의의와 평가]

결국 안동 지역에서는 일찍이 동학이 포교되어 많은 동학교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1871년의 이필제 난으로 참혹한 시련을 당함으로써 갑오농민운동에서는 미쳐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반대로 안동 지역 양반층은 학문·정치·경제, 그리고 혈연적으로 강고하게 결속함으로써 농민층을 보다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안동 지역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은 봉건 모순의 심화를 상대적으로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안동 농민층의 자기 성장이 부족하였던 것과는 달리 양반 지배층의 지배와 억압의 구조는 상대적으로 강력하였다.

안동 지역이 갑오년 난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농민들은 이후 근대사회로의 전개 과정에서 반봉건·반외세의 주체로서의 성장을 크게 제약 당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상하간의 신분 질서와 차등적인 인간관계를 보다 오랫동안 유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이후 양반 주도하에 전개된 안동 지역 반일 의병 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안동을 봉건적 구습에 묶어 둠으로써 양반 가문 상호간의 시비와, 보수와 혁신 간의 갈등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안동 지역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외면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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