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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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古昌戰鬪
영어의미역 Gochang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호동
[정의]
고려 전기 안동 지역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에 일어난 전투.

[역사적 배경]
후삼국시대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는 시기였다.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신라의 외곽인 공산을 비롯하여 고창(현 안동)과 강주(현 진주) 등 경상도의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927년(태조 10) 공산 지역에서 진행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고려는 죽령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후백제는 고창을 포위하여 죽령을 차단하고자 하면서 고창 전투가 일어났다.

[경과]
고창 전투는 929년(태조 12년) 12월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고려의 원병 파견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정월까지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고려군은 죽령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 방면으로 진행하여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운곡리를 거쳐 예안 지역에 이르러 저수봉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고창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의 선봉대가 승리하자 왕건의 본대가 예안에서 고창으로 진행하여 병산에 주둔하였고, 저수봉 전투에서 패한 후백제군은 후퇴해 석산에서 둔을 치면서 병산 전투가 전개되었다. 병산 전투에 대한 전설을 살펴보면, 안동의 호족인 삼태사(김선평·권행·장정필)의 활약에 의해 고려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진모래 전설’에 따르면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는데, 전시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로우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가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는데, 싸움이 수십 번 계속되어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 군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어 물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군은 이때다 하여 염수의 못물을 터뜨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갔다고 한다. 또 ‘밥박골’의 안중 할머니가 고삼 뿌리를 섞은 독한 술을 빚어서 후백제군의 장수들에게 제공하여 대취하게 한 후, 이 사실을 삼태사군에게 통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결과]
고려는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927년 공산 전투 패배 이후의 전세를 일거에 만회하면서 후삼국 쟁패의 주도권을 잡았다. 한편 후백제는 견훤이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참여한 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안동 지역을 확보하여 죽령 길을 통한 고려의 경상도 진출을 봉쇄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후 태조 왕건은 고창군에 안동부를 설치하고 고창성주 김선평에게 대광, 권행(전투 당시 인명: 김행)과 장정필에게 대상의 관작을 주었는데, 이는 고려에 귀부한 다른 향호들에게 주어진 관직과 비교할 때 극히 이례적인 고위직이다. 그것은 고창 전투에서 안동 지역 호족 세력의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공산 전투와 일리천 전투의 경우, 해당 지역의 호족들의 두드러진 활약상은 눈에 띄지 않고 왕건과 관련된 지명 전설이 많다.

그리고 공산 전투의 무대였던 대구와 일리천 전투의 무대였던 선산 지역이 고려시대에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으로 존재한 데 비해, 고창 전투가 벌어진 안동의 경우 안동부가 되는 등 수령이 파견된 주읍으로 존재한 이유도 고창 전투에서 안동의 호족 세력들이 왕건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고창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승리하자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강릉 지역에서 울산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110여 개 성이 고려에 귀부하는 등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면서 결국 신라는 고려에 자진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안동의 고창 전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는 중요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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